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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컨설팅 디자이너를 기준으로 함. “브랜딩이란 무엇인가요?” 질문에 밀려오는 소리없는 함성은 환청이 되어 귓등을 때린다. ‘맥락’ 그리고 ‘나다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의 브랜드 디자이너 인터뷰를 보면 직업이나 직무에 대한 설명이 추상적이다. 질의응답이 아니라 사색에 잠긴 혼잣말처럼 느껴질 정도다. 다른 행성, 다른 차원에 사는 사람도 아니라면 우리는 지금 당장 차를 타고 지방 한적한 농촌 마을 경로당에 들어가 “그래 자네는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 라고 어르신이 물을 때도 쉽고 명확하게 설명이 가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가요?” “아.. 그 브랜딩…” “아니, 로고 같은 거 만들어요.” 결국 브랜드 디자이너는 로고..
돈으로 돈을 번다는 말은 결국 빚으로 빚을 번다는 이야기다. 아프지 아니하고, 다쳐서도 아니 되고, 좋은 경험은 몰라야 한다. 그 칠흙같은 뻘은 열심히 노력해서, 걸어서 나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격을 깨는 "파격"이 필요하다. 범죄가 되었든 다른 수단이 되었든 간에 말이다.
상사의 의견에 의문을 품으면그 이견이 다툼 없이 인정되는 사실이라 할지라도고집있는 사람이 된다.여기서 따지고 드는 제스처가 더해지면 상대는 더이상 말을 하고 싶지 않아지게 된다.그 말인즉슨 정보를 얻을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백 마디가 다 유익할 순 없겠다.내게 필요한 정보는 백 마디 중 열 마디만 되어도부가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사회생활"혓바닥에 딸랑거리는 쇠방울 고리를 거는 것이 아니라현명한 처세란 무엇인가.굳이 하나하나 반박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적당한 오해, 적당한 억울함그것이 필요한 것이다.(오해도 대게 썰물에 드러나는 유리병처럼쉽게 그 진실이 드러나고, 목격자는 다음부터물에 잠긴 갯벌을 쉽게 가늠하려 하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만난 일론머스크와30분 간 대화를..
나 그리고 가족, 연인, 친구, 동료. 단결의 힘은 그 집합 단위만큼의 크기나 힘을 가진 "적"이 필요하다. 내지는 그만큼의 사건이 필요하다.
우리는 좋은 사람 내지 괜찮은 사람으로 보여지고 싶을 때 비굴해진다. 이는 어쩌면 어느 공동체에서 외로워지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소속된 정당이 있고, 입지가 어느정도 다져진 상태라면 꽤나 배짱있게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일개 무소속짜리 하나가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선 적당히 비위를 맞추고 기어야 한다. 위대한 외침은 목숨이나 걸고 하는 이야기다.
애초에 결혼이라는 제도는 인간에게 맞지 않다. 아니, 인간 수명이 비정상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어처구니 없는 제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평균 수명 30세에 피임 도구가 없던 시대라면 모를까, 100세를 바라보는 21세기의 오늘날 과연 결혼이라는 제도가 우리 인간의 속성에 맞다고 보는가. 사랑은 금세 도태되고, 되려 결혼이야말로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잃는 형국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결혼에 있어 최적의 상대는 '우리 이 정도면 잘 맞는 사이'. 어차피 살 부대끼며 다각을 맞닿다 보면, 인간은 피차 맞춰질 수 없는 존재임을 '그제야' 깨닫기 마련이다. 착각을 전제로 서로 좋아했던 몇몇 장면들을 추억하며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다. 결국엔 포기하고 버티며 살거나, 유책배우자 운운하며 '위자료' 다툼으로 번질 뿐이다...
잠을 자고, 출근을 하고, 일을 하고, 퇴근을 하면, 온전한 나의 일말의 시간이 찾아온다. 그것은 다시 나의 온전하지 않은 시간을 위해 소진되고, 다음 하루의 피로를 더한다. 세상은 내가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바쁜 걸음으로 깨어있다. 참 웃기는 일이다. 하루 온종일 치열하게 일하는데도 아직까지 식당에서 밥 한끼 사먹기가 부담스럽다. 어디까지 목을 조르듯 나의 시간을 죄어야 하는가. 최소한 일 한 시간만큼만 자유의 시간이 보장될 수는 없는가. 신분 제도가 없어졌는가? 당신도 우아한 노예나 다름없다.
사람은 도형화하면 수백 각은 나오지 않나. 낯선 여행지에 하루 마주치고 떠날 사람과, 직장 동료와 연인 사이는 각각 맞닿아 볼 물리적 숫자가 현저히 차이난다. 수백 각이 어찌 다 맞겠는가, 상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면보다 마음에 드는 면이 더 많고, 마음에 드는 면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을 포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겨우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괜찮은 사람일거란 착각, 겨우 두 세개 면 맞닿아 보고 나머지 면들을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순진무구를 표방한 얼굴로 제 한 번 살아보겠다고 검은 비닐봉지를 싸매고 온다. 생명의 창자를 뒤적거리는 소리는 언제나 고통의 비명으로 들린다. 주변을 일시 마비 시킬정도로 악을 쓰고 버티지만, 송장이나 다름 없는 나무 젓가락과 함께 찢겨 아가리를 벌린다. 추악한 군침 뚝뚝 흘리며 먹어치우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우아하고도 역겹다. 이름 모를 무고한 영혼을 자르고 닦고, 볶고, 찔러 알록달록한 접시에 담는다. 그윽한 조명,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잠깐!" 범죄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재미로 죽이는 것이나, 인간이 못 먹어치워 그냥 버려지는 생명들이나 뭐 크게 다를 바 있나.
이 세상에 정상인 사람이 존재할까. 우리 사회 어느 한 켠이라도 정상적인 환경이 존재하는가. 겨우 처음 살아보는 세상, 모두가 미흡한 존재에 불과한 것을. 만취한 덤프트럭이 인도를 침범해 들이 받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가 정상으로 태어났겠으나 그렇게 피치 못 할 무차별적 '사고'를 당하며 자란다.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썩어 문들어져가는 보편적인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무덤덤하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거지" 스스로를 세뇌하는 자들만이 '정상인' 딱지를 붙이고 사는 게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