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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살아야 하지? 내가 살아야 되는 이유 없이 하루라도 존재하고 있는 저 자신을 참을 수 없었어요. 미래의 딸에게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빠, 아빠 직장 다닐 때 일본에서 한글을 수입했다며, 근데 아빠는 뭐했어? 그때 아빠는 디자이너였잖아.” 말문이 막혔습니다. 저는 그때 이도를 만났습니다. 이도는 스물 네살에 왕이 되었지만 백성들의 아픔을 다른 왕과는 다르게 자기의 아픔으로 생각했습니다. 중국의 속국으로 살아가는 국가적인 정체성 민족의 정체성은 고사하고 민족적인 자존심 하나 없이 한자를 못 읽어서... 미국 시카고에 있는 한 대학은 외국 학장임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글날 축전을 보냅니다. 학교 휴교합니다. 그분이 늘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글날은 대한민국의 축제만이 될 수 없다. 전 인류의 축..
초등학교 3학년 첫 개학날이 기억난다. ‘아직 초등학교 4학년 5학년 6학년. 그리고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그 많은 학교 가야 할 날들 중에 나는 겨우 초등학교의 중간을 향해 막 시작했구나.’ 참으로 막막했다. 시간이 이보다도 안 갈 수 있을까. 첫 학기 교과서, 첫 페이지 글씨는 그래도 절도가 있었으나 금새 뼈대가 하나씩 나가버리는 현상은 나의 심리적 상태를 반영한 것과 같았다. 그로부터 16년이 흘렀다. ‘왜 출발하지 않는거야?’ 라고 외쳤던 롤러코스터를 탄 어린이는 그 속도감을 맛보고는 입을 다물게 되었다. 도리어 왜 멈추지 않는냐며 소심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해를 거듭할수록 키와 몸무게가 불어난 이유인지 가속은 더해져만 갔고 그에 따라 삶은, 방향보다 ‘속도’에 뒤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
대출 과정에서 은행이 실수를 했다는 이유로 화가 난 고객이 지난 5년 간 이 은행을 상대로 여섯 건의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그런데 이분의 소송 자체가 법 논리적으로는 옳지 않기 때문에 이길 수가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 소송 과정에서 너무나 은행을 괴롭히는 거예요. 괴롭힐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다양한 직원들을 증인으로 부르는 거예요. 판사님 앞에서 선서하고 증언하면 상당히 떨리거든요. 그 다음에 한 2년, 3년 전의 일을 물어본단 말이죠. 기억이 애매한 것들에 대해서 예스나 노 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그러면 물어보고 제대로 답변 못 하거나 애매하게 답변하면 바로 그 은행원을 위증죄로 고발해버리는 거예요. 지난 5년동안 증인으로 불려나와 위증죄로 고발된 사람이 열댓명이에요. 물론 그 과정이..
'힘을 빼세요', '힘 빼는 법을 배우는 게 수영입니다.' 짧게 나마 수영을 배울 때 강사가 항상 강조했던 말이다. 물에 빠져 죽을 뻔한 어릴 적 경험 때문에, 꽤 오랜 동안이나 얼굴을 물 속으로 넣는 일 조차 하지 못 했지만, 극복하기 위해 딱 한 달, 물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말처럼 쉽게 되진 않았다. 매일 1.5리터 정도의 물을 마셨던 것 같고, 얼마나 온 힘을 다해 물을 갈랐는지 매일 수영이 끝나고 나면 하루가 피곤으로 물들었다. 악착같이 발악을 한다고 해서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빠르게 가는 것도 아니었다. 힘을 빼야하는 것이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돈은 네발이 달렸고 사람은 두발이 달렸다. 계획과 목표를 너무 확고하게 세우는 사람들은 운이와도 운 인지 모른대요. ..
대게 사람들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여러 감정들 중에 가장 삶을 어렵게 만드는 감정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로움 이고요 두 번째는 열등감 인 것 같아요. 부정적인, 어두운 감정 중에서 최악으로 뽑는 두 가지가 외로움과 열등감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거울 보시죠? 내가 잘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런 얼굴 말고요, 그냥 평소의 내 얼굴. 그거는 거울에 안 비치고 스스로 생각해보면 눈 앞에 그려볼 수 있어요. 내가 어떤 얼굴로 오늘 하루를 살았나. 옛날에 성평등 의식이 부족할 때 생긴 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현대식으로 적절히 고치면 사람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이렇..
2015.02~2019.01 경영자가 될 것인가, 디자이너가 될 것인가. 18년 어느 어스름한 저녁, 딱딱한 구두에 구겨놓은 발이 지하철 바닥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눈감고 기대어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그 날은 떨리는 손에 명함과 포트폴리오를 쥐고 하루종일 발품을 팔았던 날이다. 그것은 좌절이 아니었다, 건강한 물음이었다. 나는 반응을 보인 곳이 아니라, 내가 찾아간 곳에 성취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공식적인 기간을 더해 어언 4년에 가까운 시간. 나는 계획과 전혀 다른 길로 발견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기적이었다. 우여곡절의 산증인이 된 2018년 12월. 나의 기적은 첫째, 내가 그림을 그리고 있다. 둘째, 그것으로 돈을 받기 시작했다. 셋째, 그리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그림 못 ..
2015.03~2018.10 군을 전역하면서 완전한 독립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우선적으로 경제적 독립이 되어야 했고, 어떤 일도 해낼 수 있을 거란 확신 또한 있었기에 알바천국에서 가장 높은 페이의 주말 알바를 검색했다. "돌잔치 결혼식 사회자 구합니다." 일당이 무려 10만원이었다. 한 달을 꼬박 채우면 80만원이나 되는 것이었다. 고되고 힘든 일에는 자신 있었으나 이 일은 천부적인 끼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망설여졌지만, 구인 소개글에 가장 강조되는 문구가 보였다. "타고나지 않아도,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일주일 정도 고민 끝에 전화를 했다. "알바천국 보고 연락드렸는데요~" 사무실은 간판 하나 없는 상가의 4층이었다. 3층 즈음 올라서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웅웅 거렸다...
번호대기표를 받았다. 적지 않은 남은 대기자 수 인원이 적힌. 마감시간을 앞두고 마음 졸이다 겨우 호명된 번호에 등록금을 입금했다. 또 다른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고등학교 그 두 번째 칸을 채울 무렵, 뒤늦게 꿈을 좇았지만 성적마저 바꿀 수는 없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날고 싶었지만 나는 물에 젖은 종이비행기였다. 그저 붙었다는 것만으로도 큰 안도였다. 3월의 따스한 봄 햇살에 물기를 빼앗기고 바람의 도움 받아 조금씩 이동을 시작했다.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하고 재밌었다. 첫 비행, 목적지를 알고도 피어난 꽃에 한 눈 팔려 비행기의 본분을 잃어버렸으나 첫 봄은 나쁘지 않았다. 취미 혹은 놀이라고 이름 붙여야 할 과목들이 전공과목이라 한다. 12년간의 설움이 낮게 흔들리는 어깨에 탈탈 털려 허탈한 소리..
2013.05.27~2015.02.26 늘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나, 나는 내 자신이 싫었다. 그런 내게도 피해갈 수 없는 시간, 군대. 나는 사실 군대를 빨리 가고 싶었다.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왕 가는 군대, 듣도 보도 못한 해병대를 지원하기로 마음먹었다. 주변엔 해병대를 전역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문화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네이버 검색 뿐이었다. 이상한 말들이 많았다. 구타와 가혹행위, 총기 난사. 덜컥 겁이 났지만 거기서 버티지 못하면, 남은 인생도 더 이상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의 나로서는 엄청난 선택이었다. 누구에게도 말 하지 않고 지원하기를 세 번, 무려 두 번이나 떨어졌다. 안 되면 될 때까지 라는 말을 되뇌며 지원 과정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