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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lecture

얼굴 (유시민-한국해양대학교-2013)

2e2e 2021. 8. 16. 13:50

대게 사람들이 한 생애를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여러 감정들 중에

가장 삶을 어렵게 만드는 감정이 몇 가지 있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외로움 이고요

두 번째는 열등감 인 것 같아요.

부정적인, 어두운 감정 중에서

최악으로 뽑는 두 가지가

외로움과 열등감이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거울 보시죠?

내가 잘 살고 있는가를 보려면

거울을 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그런 얼굴 말고요, 그냥 평소의 내 얼굴.

그거는 거울에 안 비치고 스스로 생각해보면

눈 앞에 그려볼 수 있어요.

내가 어떤 얼굴로 오늘 하루를 살았나.

 

 

 

옛날에 성평등 의식이 부족할 때 생긴 속담이에요.

남자는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현대식으로 적절히 고치면

사람은 마흔이 되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이렇게 바꿀 수 있겠죠? 근데 왜 마흔인지는 모르겠어요.

제가 보기엔 스무 살만 되어도,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보면

얼굴은 마음의 표현이거든요, 여러분들이 아마 알고계신

제일 좋은 기업은, 제일 가고싶은 기업? 청년들이.

삼성그룹 회사던데요, 여론조사를 보니까.

삼성그룹의 창업자가 지금 이건희 회장의 부친인

이병철 회장이 창업자입니다.

아직 삼성그룹이 작은 기업이던 시절,

이병철 회장이 신입사원 면접시험을 볼 때

옆에 누구를 앉혀 놓고 면접시험을 봤다는게 유명합니다.

어떤 사람을 앉혀놨냐, 관상보는 사람을 앉혀놓고

신입사원을 뽑았다는 거예요.

항간에는 도대체 왜 관상보는 사람을 앉혀놓고 사람을 뽑았을까,

이병철 회장이나 삼성그룹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식을 가진 분들은

워낙 불법적인 일을 많이 하면서 기업 경영을 했기 때문에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고르려고 그랬다.

그런 해석이 널리 퍼져있죠.

근데 저는 꼭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지금처럼 삼성그룹이 일 년에 숫자를 엄청 뽑으면

회장님이 직접 면접을 볼 수 없겠죠.

그러나 그렇지 않고 직접 기업 경영자로서 내가 면접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저도 얼굴을 볼 것 같아요.

제가 관상 전문가는 아니지만.

뭐 때문에 얼굴을 보냐,

실제로 얼굴을 통해서 뭘 보냐면,

사람의 마음을 보려는 거예요. 마음.

사람의 마음은 얼굴 표정으로 나타나요.

 

관상이라는 것은 얼굴을 보는게 아니에요.

관상을 본다는 것은 뭘 보기 위한거냐,

심상을 보기 위한 거예요.

사람의 마음이 왜 얼굴로 나타날까,

감출 수 있지 않나? 못 감춰요.

 

우리의 안면 근육은요,

일종의 자율신경 이에요.

내가 일부러 표정을 짓지 않아도,

내 마음 속의 어떤 감정이 느껴지면

그 감정이 안면 근육의 움직임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나타납니다.

일부러 표정을 지어 보일 수는 있지만

진짜 좋아서 웃는 표정과

내가 저 사람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줘야 되겠다고

짓는 웃는 표정은 다르죠.

여러분 다 알고 계실 겁니다.

 

 

 

왜 인간은 다양한 표정을 저절로 짓도록 만드는

안면의 잔근육을 이렇게 많이 발전시킨걸까.

또 이게 왜 필요했을까, 또는

왜 인간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는 능력을

놀라운 수준까지 발젼시켰을까.

이른바 안면인지능력.

살아남기 위한 노력이겠죠.

대게 인간은 수십 만년 동안 수렵 채집 시대에

백 명 내외의 작은 혈족집단 또는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일상적으로 호혜적인 교환을 하는 소집단에서

수십만 년을 살았어요. 그 과정에서 지금의 현대인으로

진화 돼 왔습니다. 그러니까 낯선 사람을 만날 때는

대화를 해보기도 전에 그 사람이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알아야 돼요. 그래서 피아를 구분하지 못 하면

살아남기 어려운 경우가 대단히 많았기 때문에

우리 얼굴 표정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도록 만들어졌고,

내가 마음 속에 어떤 사람에게 우호적인 감정을 느끼면

빨리 표현해야 돼요. 그래야지 공격을 안 받죠.

상대방의 얼굴에서 적대적인 감정을 읽어내면,

곧바로 대비에 들어가야 돼요. 읽지 못 하면 당하는 거니까.

서로 간에 필요에 의해서 굉장히 정교한

안면 표정과 그 인식 기술을 우리가 진화적으로

발전시켜왔다고 저는 생각해요.

그러니까 내 얼굴을 보면.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다는 거예요.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또는 이대로 계속 살아가도 좋을지를

판단할 때 어떤 논리로 판단할 수도 있고,

어떤 경험을 가지고 판단할 수도 있겠으나

종합적으로 내 자신이 나의 삶을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길은

내 얼굴을 보는 거예요.

 

 

 

지금 청와대에 계신 박대통령의 아버지 박대통령이

대통령이시던 시절인데요,

제가 말을 막 배울 때 대통령이 되셨어요.

제가 두 돌이 되기 전에 권력을 잡으셨는데,

제가 대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계속

대통령 이셨거든요, 열여덟 해 동안.

그러고 김재규 경호실장이 총으로 쏴서 죽지 않았다면

그 뒤로도 10년 이상은 더 대통령을 하셨을 거예요.

그때 제가 대학을 들어가서 보니까

그냥 이렇게 내 삶만 설계하고 살기에는

조금 좋지 않은 상황이었어요.

길 가는데 어떤 덩치 큰 남자가 힘 없는 시람,

여자, 애들을 패고 있는 걸 봤다. 우리가.

그 남자 덩치가 최홍만 선수 만해요.

여러분은 어떻게 하실래요.

같이 말리려고 대들었다간 어디 부러질 것 같애.

제일 좋은 방법은 112에 전화하는 거죠 빨리.

근데 전화를 그 사람이 받아요. 그가 경찰이야. 패는게.

그럼 대책이 없죠.

대게 우리가 봤던 상황이 그런 상황 비슷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를 눈 질끈 감고 내 일이 아니니까 지나가느냐,

아니면 저거는 나쁜 일이니까 달려들어서 한 번 엉겨보느냐

둘 중에 하나예요. 근데 대통령이잖아요.

대통령이 그렇게 노동조합 만든다고 사람 잡아가고

자기 생각을 말했다고 잡아 가두고, 유신체제는 이제

박정희 대통령이 마음만 먹으면 영구 집권을 하는 체제였는데

그 유신체제를 비판하면 긴급조치위반이 되게 돼 있었고,

긴급조치위반 사건에 대해서 허락 없이 얘기를 하면

그것도 긴급조치위반이 되게 돼 있었어요.

긴급조치를 비난하면 또 긴급조치 위반이에요.

어떻게 하라는 이야기야.

 

그래서 이걸 눈 질끈 감고 지나가면 좀 인생이 편할 것 같고,

근데 나중에 늙어서 생각하면 되게 비겁할 것 같더라고요.

내 청춘이.

그래서, 같이 덤벼봐야 이기지 못할 건 너무 뻔하다.

맨주먹으로 학교에서 유인물 뿌린다고 그게 바뀌겠어요,

근데 그냥 지나가면 너무 비겁할 것 같아서

야 이건 소리라도 한 번 지르고 가야 된다. 한대 얻어 텨저서

갈비뼈 부러지더라도. 그 때는 소리 한 번 지르면

징역 3년이 기본이었거든요, 학교 안에서

‘독재 타도 민주 쟁취’ 이런 거 한 번 하면 딱 1분 외치고

들어가면 징역 3년이던 때였어요.

판사들은 징역 3년을 정찰제로 때리고, 법정에

그 당시 중앙정보부 직원들이 나와서 판사의 발언을 일일이

녹음하고 기록할 때예요.

데모를 해도 보도 한 줄도 안 나올 때고요,

그러니까 어찌보면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어요.

그냥 비겁한 청춘을 보내기 싫어서

어디 부러질 각오를 하고 대드는 것 말고는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는.

비겁해지든가, 어디 부러지든가 둘 중에 하나였으니까.

별로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고 또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

어른도 별로 없었어요.

인생을 어떻게 살아라 이런거. 그래서 저는 그렇게 보냈는데 20대를.

그러다보니까 정치도 하게 되고 닥치는대로 살게 되었는데

뭐 지금도 사회에 문제가 많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경찰이 길거리에서 사람을 패는 시대는 아니잖아요.

저는 여러분이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고

남들에 대해서 진지한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 삶을 잘 설계하고,

그것을 자기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가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게 매우 중요하고도 가능한 시대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얼굴을

이제는 스무 살이 넘어서 내 삶에 대한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 자신이 해야되는 시기가 왔기 때문에

자기 얼굴에서 나타나는 감정, 자기 얼굴 표정이

타인에게 전달하는 감정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이

책임을 질 나이가 되었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 얼굴을 하고 살기 위해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 내가 나에게 즐거운 일을 찾는거예요.

부모님의 기대, 사회의 시선, 사람들의 통념 이런 것은

고려 대상이지만 그닥 중요한 것은 아니다.

저는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거저 받은 것에는 가치가 없어요.

여러분이 자라온 환경이 전부 다르고

지금 처해있는 환경이 전부 다르고

자기가 가지고 태어난 것이 다 달라요.

뭔가를 잘 하는 사람도 있고

또 그만 못하는 사람도 있어요.

그러나 진짜 인생의 의미라는 거

그것은 내가 가지고 태어난 것을 가지고

내가 처한 환경 속에서, 주어진 많은 제약 조건 속에서

내 스스로 찾은 길. 내 스스로 설계한 인생.

그 인생을 내 힘으로,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살아나갈 때, 지위가 어떠하고 재산이 어떠하며

세속적인 성공과 실패가 어떠한지 상관 없이

그렇게 산 사람은 세상을 떠날 때

다음에 태어난다면 좀 다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이미 살아버린 삶도 훌륭한 삶이었다고 생각해.

이렇게 자기 삶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면서

이 세상과 하직할 수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세상을 다 살고 떠나면서

자기가 살아온 삶이 최상의 삶은 아니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한 삶이었고, 주체적인 삶이었다고

자기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그 삶만이 의미있는 삶이다.

우리 인생에서 가치있는 것은 그것 밖에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금 여러분 나이에 꼭 해야할 일,

나에게 즐거운 일을  찾고 그 일을 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는 일에 매진하시기를 바랍니다.

 

 

 

Q&A

 

혼인하기 전에도, 연인 사이였을 때도

진짜 남녀간에 감정의 교류, 어떤 사랑의 느낌을

제일 많이 가로막는 것이 소유의식이라고 생각해요.

‘내 거다’ 이거요.

내 게 아니거든요,

사람은 다른사람이 것이 될 수 없어요.

그점이 제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뒤에 서있는 건 독수리입니다.

앞에는 여자아이가 굶주림과 갈증에 지쳐 죽어가고있는 장면이에요.

그냥 객관적으로 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앞의 사진이나 이 사진이나 똑같아요.

(앞 : 어린 새끼를 쫒는 치타의 사진)

포식자와 피식자가 있습니다.

독수리는 죽은 고기만 먹으니깐요, 죽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먹이사슬이고요, 모든 것이 동일해요.

그런데 이 사진은 앞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으로 우리한테 다가옵니다.

이 사진은 1990년대에요 아프리카 수단에서 내전이 벌어져서

부족간에 서로 다른 무장집단과의 엄청난 학살과 약탈, 방화, 살인, 강간

이런 것들이 벌어질 당시에 어떤 사진기자가 국제구호단체와 함께

수단지역에 들어가서 우연히 본 장면을 찍은 사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진을 보시면 특별한 느낌이 드는 거는

다른 무엇보다도 저기 죽어가는 것이 사람이기 때문이죠

저 아이가 지금 느끼고 있는 두려움,

목마름, 굶주림 이게 느껴지시죠.

저 아이가 느꼈을 그런 감정들이 전해져와요 우리한테.

우리는 그걸 느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죠.

그런데 잠시 생각을 해보면 여러가지 화가 나요.

우선 의문이 저 부모는 어떻게 됐을까, 죽었을까? 죽었겠죠.

왜 내전이 벌어진거지? 인간이란 어떤 존재야?

이렇게 생각이 미치고요, 그 다음 단계로서 저 사진은

뉴욕타임즈에 게재되었던 사진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사진을 집에서 받아보는 신문에서 보셨다면

그 다음 단계는 이렇게 나오지 않았을까요,

이 사진 찍은 놈은 어떤 놈이야, 뭐하는 놈이야 도대체.

저 상황에서 사진이나 찍고 있단 말이야?

그럼 이 사진을 실은 신문사는 뭐하는 놈들이야?

엄청 화가 나서 사진 밑에 댓글을 달거나 더 열받아서

전화를 신문사에 하거나 이메일을 보내거나 그랬을지도 몰라요.

실제 상황이거든요.

이 사진이 뉴욕타임즈에 게재되고 나서 엄청난 비난이

신문사와 작가, 편집팀에 쏟아집니다.

그 분노는 아주 정당한 분노죠.

이 사람들이 일차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저 아이가 어떻게

되었냐는 것.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 아이는?

그리고 저 상황에서는 아이를 구해야지 왜 사진을 찍고 있어? 이런 겁니다.

제가 지금 이 외로움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려고 이 사진 얘기를 꺼냈는데요,

그로부터 1년 뒤에 사진작가는 자살합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남자였는데요, 물론 이 사진으로 인한

논란 때문에만 자살한 것은 아니고 다른 개인적인 어려움이 겹쳐서

고민하던 끝에 스스로 자살하게 되죠.

사람들이 느꼈던 이 분노는 굉장히 자연스러운 감정인데

그러면 그 분노에 정당한 근거가 있었느냐, 그건 아니에요.

그러면 사실은 어떻게 된 걸까, 사실은 이 작가는

국제구호단체의 구호 속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싶었어요.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구호 속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탐사하러 나갔습니다.

그러던 중에 우연히 이 장면을 보게 되죠. 빨리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나서 독수리를 쫓아냅니다.

여러분이라도 그랬을 거예요. 가서 돌을 집어던지고

독수리를 내쫓습니다. 저 아이를 구하지는 못해요.

왜냐하면 여기는 구호 속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아이를 구하려면 안고 가야되는데

구호단체 활동자들과 기자들에게 내려진 행동강령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난민들과 직접 신체접촉을 하지 말라.

왜냐햐면 온갖 전염병이 돌고 있었기 때문에.

그래서 이 아이는 기자가 안아주지 못 합니다.

구하지 못 했죠 결국은. 그리고 돌아와서 지인들에게 친구들에게

많이 울면서 이야기합니다.

이 아이를 안아주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굉장히 많이 울었다그래요.

이것이 fact입니다.

그런데 뉴욕타임즈는 왜 실었을까, 수단에서 벌어지고있는

이 참사를 알리고 싶었죠. 언론의 기능이라고 봤기 때문에.

그래서 국제사회에 관심을 촉구하고 구호활동에 더 많은

재정 지원이 이루어지길 원했기 때문에 그 사진을 실었어요.

결국 작가의 비극적 죽음으로 끝난 이 소동, 소란에서

누가 잘못한 사람이 있었느냐,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죠.

작가는 작가로서 프로답게 했고요, 뉴욕타임즈는 언론사의

철학에 따라서 사진을 게재했고요, 퓰리처상 위원회는

그 정신을 높이 사서 퓰리처 상을 줬고요, 독자들은 엄청난

정당한 분노에 사로잡혀서 항의 전화를 했습니다.

누구도 어떤 나쁜 의도를 갖고 있었거나, 느끼지 말아야 할

부당한 감정을 느끼고 한 것은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우리 인간으로서 정상적인 행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소통은 실패했죠.

소통은 완벽하게 실패했습니다.

이 작가가 그때 느꼈을 외로움, 고독함, 서운함.

이걸 한 번 상상해보세요. 누구의 잘못도 없지만

소통은 실패했거든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대게 우리가 외로움을 느낄 때.

언제냐면 타인과 교감, 소통이 안 될 때 외로움을 느껴요. 그렇죠?

사람들은 자기들끼리 잘 지내는데 나만 잘 섞이지 못하는

그런 느낌을 가질 때. 또는 내 의도는 그게 아니었는데

사람들이 나를 자꾸 오해할 때, 

한 번 오해가 생겨서 풀어보려고 노력하면 노력 할수록

더 꼬일 때. 그럴 때가 있죠.

왜 사람들은 나를 있는 그대로 보고 나를 이해해주지 않고

자꾸 나쁜 쪽으로 해석을 할까, 오해 할까.

이런 상황에 거의 예외 없이 직면하게 됩니다.

혼자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외로움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나쁜 감정은 아니에요.

그러나 그 외로움이 주는 나쁜 어떤 측면을 상쇄하는

다른 즐거움 이런 것들이 없을 때, 균형이 무너지면

외로움, 고독이라는 것은 마음의 병으로 연결되는

무서운 감정이 되는겁니다.

대게 외로움을 느낄 때는 그 외로움의 이면에

타인에 대한 서운함, 타인과의 단절감을 느껴요.

그리고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고 이해하려고 해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으로 비치고요,

자기 자신이 쓸데없는 존재처럼 느껴지게 돼요.

 

이 사례를 보시면 위로가 될 거예요.

소통에 실패하고 타인과 교감하지 못해서 내가 외로움을 느낄 때,

잘못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뜻이에요.

꼭 잘못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또는

남에게도 잘못이 없는 경우가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소통에 실패하기도 한다.

또한 그럴 때, 타인이 나에 대해서 나쁜 의도 또는 악한 감정을

지니고 있어서 그렇게 되는 것만도 아니라는 생각을 할 필요가 있어요. 

위로가 돼 줍니다.

 

 

 

원래요, 소통이 어려운 거예요.

우리는 보통 소통이 잘 되는 것을 정상적인 상황으로 보고

그것이 안 되면 이상한 상황, 잘못된 상황으로 간주합니다.

저는 이 판단이 잘못 되었다고 봐요.

원래 소통은 안 되는게 정상이에요.

일부라도 소통이 되면 그것이 기적이에요.

 

 

 

부모도 나를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주지 못해요.

연인이 그렇게 해줄까요?

초등학교 동창생 친구가요?

또는 배우자가?

절대 그렇게 못해요.

나를 있는 그대로 알고 이해하고

존중하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게 정상이에요.

 

 

 

표현의 자유에 관해서 여러가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우선 터무니 없는 주장을 허용하면 안 된다. 이런 견해가 있죠.

그것은 저는 옳지 못한 생각이라고 봐요.

원래 표현의 자유라는 거는 사회구성원의 대다수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그런 견해에게 주어지기 위해서 있는 거예요.

사회의 대다수가 옳다고 생각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특별히 표현의 자유를 강조할 이유가 없어요.

다수가 좋아하는 견해이기 때문에 그걸 제약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요.

원래부터 자유라는 관념은 국가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서

국가가 개인에게 가하는 억압과 제약

이런 것들을 풀어헤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개념이에요.

자유라는 것은 다수에 대한 소수의 자유를 말하는 거예요 언제나.

집단에 대한 개인의 자유를 말하는 거고요.

그러니까 진짜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는 것은

사회구성원 대다수가 터무니 없다고 생각하는, 판단하는

그런 견해까지도 형성하고 표현할 수 있는 자유.

그게 표현의 자유예요.

 

 

 

나 같은 쓰레기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다면

미국은 모든 시민의 자유가 보호되는 위대한 나라다

(래리 플린트)

 

 

 

대머리, 대머리가 뭐죠?

머리카락이 없는게 대머리예요.

그게 우리의 언어적인 개념이에요.

머리카락이 보통 10만개 인데요,

머리카락이 한 올도 없어. 대머리 맞죠.

머리카락이 한 개 있으면 어떡해요?

그래도 대머리예요.

두 개 있으면요? 그래도 대머린 것 같애.

5천개 있으면? 10만개 있는데 5천개면..

20분의 1밖에 안 되는데.. 그래도 대머리지.

만 개되면 어떤데요? 그러면 사람들이 슬슬 헷갈리기 시작해요.

5만개 있으면 대머리야 아니야?

반이나 있는데, 그러면 대머리라고 할 수 없지. 그렇게 이야길 해요.

그러면 그 5만개의 머리카락이 앞에하고 위에는 빼고

뒤에하고 옆에 몰려있으면 어떤데?

그럼 대머리지.

이 대머리라는 개념이요,

이것이 확실해 보이지만, 그렇게 확실하지 않아요.

경계선이 모호하다고요.

 

 

 

대장균이 음식에 나오면 난리가 나죠

식약청에서 나와서 압수수색하고 검찰에서 수사 들아가고 난리잖아요.

대장균이 해로운 균이에요? 아니잖아요.

우리 대장 속에는 대장균이 다 있잖아요.

대장균은 대장 속에 있을 때 해롭지 않다고요.

그놈이 요도에 들어가면 방광염이 일어나잖아요.

그러니까 이 대장균이라는 것은 수억 년 동안의 진화과정 속에서

우리 인간과 조화를 이루어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세균이에요.

우리도 그 세균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다고요.

걔가 그 대장균이라는 애가 대장에만 있으면 아무 일이 없는 거예요.

일베가 일베로서 있으면 괜찮아요.

근데 그게 특정 정당으로 옮겨가거나, 국가기관으로 번져가거나

이러면 문제가 심각해지죠. 뿐만 아니라

자기 주장을 하는 건 괜찮은데, 이 주장을 욕 하는 놈,

다 내가 없애버릴거야라고 말하면서 가스통을 어깨에 메고

라이터를 켰다 컸다하고 돌아다니기 시작한다,

그건 놔두면 안 되죠.

자기의 의견을 타인에게 폭력적으로 강제하지만 않는다면,

남의 비웃음을 사기 위해서 스스로 헛소리를 하는 것을

왜 말려야 돼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저는 스웨덴이나 노르웨이나 핀란드나 독일이나

이런 서유럽 북유럽 국가의 복지 시스템과 비교해서

우리가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그것에 대해 열등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는 지상 천국이고 여기는 생지옥처럼.

그렇게 볼 건 아니라는 말씀이에요.

한국사회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모든 점에서 유럽 선진국들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거든요 지금?

우리가 경제성장, 국민소득 이런 것도 매우 빠른 속도로 쫓아왔고요. 

그 다음에 건강보험, 노후연금 등등의 사회보험이나

복지 제도도 굉장히 빠른 속도로 지금 따라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출발이 늦었기 때문에,

지금 매우 미흡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문화적 차이나 역사적 환경 차이를 무시해버리고

저기 서유럽이나 북유럽은 정말 사람 살기 좋은 사람 세상이고,

여기는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생지옥이다.

이것은 저는 별로 옳은 진단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대한민국, 상당히 괜찮은 나라거든요.

아직 문제가 많긴 하지만 매우 빠른 속도로 문제를

개선해나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몇 가지 결정적인 하자들. 

노동시장에 비정규직 문제라든가, 청년 취업의 기회가 부족한 거나

몇 가지 문제만 잘 해결을 하면 단군할아버지가 이 땅에 터잡은 이래

이렇게 자유롭게 풍요롭게 자기 원하는대로 살 수 있던 시대가

언제 있었었죠? 이렇게 평화로운 시대가 언제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더 좋은 것은 원하더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귀한 것의 가치는 그것대로

알고 인정하고 누리면서 가면 더 좋지 않을까,

그런 기우를 말씀을 드리면서 대한민국 괜찮다.

그렇게 저는 말씀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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