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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 초등학교 5학년, 에스컬레이터가 있는 마트를 처음 가보았다. 모든 것이 생소하고 신기했지만 가장 큰 이목을 끌었던 건 바로 삼겹살 청년이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씩씩한 청년의 우렁찬 목소리는 최소 성악과 3학년 쯤 돼 보였다. "삼겹살 한 근에 만 원!" 짙은 눈썹 아래 떠오른 눈동자마저 여유로 가득해 괜시리 기가 죽었었다. 그때 함께 지켜보던 엄마가 내게 물었다. "니도 나중에 저래 할 수 있겠나?"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나의 내성적인 성격에 대한 결핍을 낭비하듯 발산하는 그의 모습에 존경심마저 들었지만 애초에 나와는 다른 도면으로 설계된 인간처럼 참 낯설고도 멀게 느껴졌다. 그로부터 약 9년, 스물 하나가 되던 해, 군 입대를 앞두고 집 근처의 ..
한 달쯤 일했을까, 방학 단기아르바이트생임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회식자리에 참석하게 됐다. 그 날 오리고기집에서 처음 사장님을 뵙게 되었는데, 그는 평소 선을 아슬하게 넘나드는 과장들과는 다르게 곧 근무 기간이 끝나는 스무살 남짓한 내게도 꽤나 조심스럽게 말을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어딜가나 막내였고, 심부름꾼이었던 나도 존중받는 사람이었다. 마음의 문이 열리고 건너온 메시지는 1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에서도 선명하다. 그것은 사장이라는 자리에 오르기까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그의 신조였다. "일부러 불편한 자리에 가는 것." 동네 친구들과 매일 갖는 무의미한 술자리와 같이 편한 자리만 찾게 되면 득이 될 것이 없다, 낯선 사람과 불편한 자리를 일부러 찾아가는 과정 속에서 얻는..
연극에는 숨길 수 없는 소리가 있다. 관객을 향한 배우의 힘찬 발구름 소리. 유독 그 소리가 적나라한 이유는 지난날 허기진 배를 두드리는 듯한, 가볍고 저렴한 마룻바닥이 절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대게 성인이 되면 사회적 언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 말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는 사포질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에 꺼내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 암묵적인 관례를 알기에, 또 함께 닦아 내오고 있기에 깎여나간 부스러기를 붙여, 본래 있던 날카로운 모서리를 찾아내곤 한다. 예컨대 "아, 이것보다는 저게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아 이건 너무 촌스럽고 진부해요."라는 식으로 필터된 말을 다시 역필터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워드는 점점 무색해진다.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톤이었는지,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은 몇 초 정도 되었는지. 0이라는 대답을 두고 +, -오차 범위에 대한 추리로 가득한 세상. 착각은 자유, 오해는 금물. 때론 이처럼 확신으로부터의 격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