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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은 결국 의미의 밀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데이터를 이야기로 바꾸고, 사실에서 통찰을 끌어내는 행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은 고통이지만, 의미가 이해되면 그때부턴 제법 들을 만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의미를 손에 쥐면 같은 현실을 다르게 살 수 있었다. 스마트폰과 SNS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2010년 이후의 변화를 요약하자면 이 두 문장이 아닐까. '기업, 개인, 사물...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볼 게 너무 많다' 2010년대부터 신문과 잡 지는 손꼽히는 사양 산업이 되었고,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업계 전체를 덮쳣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잡지가 망해가는 게 아니고, 세상이 온통 잡지화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 설사 종이 잡지가 사라진..

생애 가장 시간이 안갔던 때는 단연 군시절을 꼽을 수 있다."아직도 시간이 이것 밖에 안 지났나.."하루하루가 길고 질겨 도저히 삼킬 수가 없었다.마냥 나빴던 것만은 아니다.한 편으론 수명이 길어진 느낌이 들기도 했는데,시간이 빨리 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사실빨리 죽음에 다다르고 싶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킬링 타임용이다"그래서 난 군 전역을 이후로 이 말이 참으로 어리석게 들리기 시작했다.매 시간 일분 일초가 다 값져야 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시간을 죽인다는 섬뜩한 관용적 표현 자체에 대해 말이다. 언제부턴가는 명절 오후 고속도로가 반갑기 시작했다.눈코 뜰 새 없이 죽음을 향해 가속 페달을 밟아대는 내 시계가속도를 늦추어 하루를 음미하는 기회를 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지난 30여 년간 내게 아침이란11m 막타워나 다름 없었다.공수 훈련을 위해 훈련소에서 내던져지는 막타워 말이다.한 발만 내딛으면 끝나버리는 건데, 5분만, 10분만을 미루게 되는 것은아침의 높이 또한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11m이기 때문이지 않을까.아침에 눈을 뜨기 싫다는 건 삶에 대한 동기가 없다는 것. 어쩔 수 없이 매일 아침을 맞이해야 한다면 세상이 나를 깨우는 것보다내가 세상을 깨우는 편이 조금 더 낫다.일찍 일어나면 내가 세상을 깨우는 느낌이고늦게 일어나면 세상이 나를 깨우는 기분이다.아침을 미루고 미루다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건회의 시간, 여유롭게 커피도 일찍 내리고 안건 내용도 미리 살펴본 사람들 사이에헐레벌떡 착석한 기분이랄까. 타인의 시간을 좇는 기분은 온종일 지속된다. 세..

"저는 섹스와 돈만 있으면 돼요" 꿈, 희망, 연민, 사랑, 성취... 삶을 구성하는 모든 것들은 결국 두 가지로 편입된다. 섹스 그리고 돈이다. 저급하다 생각이 드는 당신도 이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명절이면 연장자가 묻는 두 가지 안부. "결혼은 언제하니?" "취업은 했니?" 인간도 동물이다. '생각' 좀 한다고 해서 먹고 사는 문제와 번식을 생각하는 자연의 섭리에 대해 감히 저급하다 말할 수 있는가.

업이 느슨해져 시간이 조금 남는 느낌이 들 때면 딴 짓을 하고싶어진다.디자이너라면 포트폴리오를 다듬거나 개인적인 디자인을 하는 것들 말이다.허나 군대에서 느낀 것이 하나 있다.나이도 비슷하고, 입대 날짜도 기껏 두 세달 차이 밖에 안나는 나의 선임은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가짐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꿰뚫어 보았다.속된 말로 '갈굼'을 위해 연사 사격을 하다 얻어 걸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나의 두 세달 후임이 들어오고 나니 나 역시 그들의 속이 훤히 들여다 보였다.또래들의 작은 사회, 군대에서 마저 이렇게 훤히 보인다면바깥 사회의 10년 차 20년 차 선배들은 나를 얼마나 더 적나라하게 보고 있을까.이 때 다짐 했던 것은, "속인다고 속여지는 것이 아니라면, 차라리 떳떳한 편에 서자" 였다.5..

잘 쓴 제안서란 뭘까? 우선 읽히는 제안서다. (...) 읽어보려고 애써도 안 읽히는 제안서도 참 많다. 그럼 잘 읽히는 제안서는 어떻게 쓰나? 우선 쉽게 상대방이 읽고 싶은대로 쓰면 된다. 상대방이 궁금한 내용을 궁금해하는 순서로. 그래서 제안서의 목차는 상대방의 질문이어야 한다. 기획 제안서 작성 6단계 1. 왜? - 너 이런 문제 있잖아 2. 그게 왜? - 사실 이것 때문이거든 3. 그래서 뭐? - 그래서 이걸 제안 4. 딴 것도 많잖아? - 다른 것 대비 이게 좋아 3가지 5. 그래서 어쩌라고? - 이렇게 진행할 수 있어 6. 근데 꼭 해야 되나? - 이런 효과를 얻을 수 있어. 기획 프로세스 1. Who? (듣는 사람이 누구인가?) - 먼저 지식과 관심도가 얼마인지 알아야 - 이미 알고 있는 것..

신입생 첫 학기를 마치고 교수님께서 방학 숙제를 내주셨다. "최대만 많은 걸 보고 와라"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디자이너로서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낭만적이다. 첫 입사 후 만난 디렉터가 내게 말했다. "보는만큼 그린다" 기획, 콘셉트,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어쨌든 디자이너는 최종적으로 시각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습관은 "많이 보는 것" 돌아보니 보는 것도 단계가 나뉘었다. 1. 눈으로 인지하는 것 (3sec) 2. 눈으로 그려보는 것 (10sec) 3. 손으로 그려보는 것 (30sec) 4. 툴로 똑같이 그려보는 것 (40min) (단계별로 대상을 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 내가 만난 현업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 하는 '디자인이 가장 빠르게 느는 방법'은 ..

숱한 디자인 보고서, 제안서를 보며 드는 의문이 한 가지 있었다. "클라이언트가 정말 이해를 할까?" 장표에 사용되는 용어부터 가독에 큰 돌부리가 된다. 브랜드 에센스? 브랜드 핵심 가치? 업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전문 용어는 익숙하긴 하지만, 매번 "그래서 정확하게 의미하는 바가 뭐였더라?" 다시 검색해서 정의를 찾아보곤 한다. 이제 5년차에 접어든 나 역시 쉽게 이해하고 있는 편이 아닌데 디자인에 문외한인 클라이언트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마치 의사 처방전같이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문 용어로 휘갈겨 우리만 겨우 알아볼 수 있는 것이다. 보고서 내 영문 표기도 마찬가지다. 영단어를 사용하면 단어 고유 의미를 고스란히 전할 수 있고, 또 특유의 전문적 이미지가 있어 이점은 있으나, 한국인에게..

디자인은 요리처럼 일식전문가, 중식전문가 어느 특정분야에 치우치지 않는다. 디자인은 그냥 디자인이다. - 강구룡 학부 시절 교수님께서 해주셨던 인상적인 말이다. 당시 나의 해석은 - 편집디자이너 - 브랜드디자이너 - 영상디자이너 - UI/UX 디자이너 등 으로 나뉘는 직업군이 "주특기"일 뿐이지, 결국 디자이너라면 응당 모든 분야의 "디자인"을 할 줄 알아야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느꼈다. 하지만 막상 실무로 접어드니 디자이너는 나만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에 공감이 가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방어기제라고도 생각한다. 내가 그나마 잘 수행할 수 있는 특정 분야를 꽉 쥐고 있어야 시장에서 가치를 떨어트리지 않을 수 있고, 그것을 유지하려면 이 분야 저 분야 기웃거리는 것보다 가장 안전한 내 영역 ..

거리에 스쳐지나가는 매력적인 사람들에게서 종종 쓸데없는 피로감을 느낀다. "나랑 맞지 않은 면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비단 이성관계 뿐만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은 절대 잘 맞을 수 없다. 잘 맞는 "부분"이 잘 맞지 않는 부분을 어느정도 가릴 수 있다면 우리는 겨우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이다. 어쩌면 사소한 것에 다툰다는 것은 사소하지 않은 부분들이 잘 맞는다는 희소식이 될 수 있다. 연인과의 만남에선 대개 두 번 눈이 멀게된다. 첫 번째는 처음 만나는 때다. 사랑은 무지에 기초한다고, 아직 모르는게 너무나도 많은 이 사람을 내가 사랑씩이나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익숙해지면서 잘 맞는 부분을 망각하는 것이다. 멀쩡한 과자 한 봉지를 두고 부스러기만 바라보다 눅눅해진 과자를 통째로 버리게 되는 꼴이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