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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토리얼 씽킹 (최혜진-2023)

2e2e 2024. 3. 19. 00:28

편집은 결국 의미의 밀도를 높여가는 과정이다.

데이터를 이야기로 바꾸고,

사실에서 통찰을 끌어내는 행위이다.

 

 

 

이해할 수 없는 소음은 고통이지만,

의미가 이해되면 그때부턴 제법 들을 만해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의미를 손에 쥐면 같은 현실을 다르게 살 수 있었다.

 

 

 

스마트폰과 SNS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2010년 이후의 변화를 요약하자면

이 두 문장이 아닐까.

'기업, 개인, 사물... 모든 것이 미디어가 되었다'

그래서 '볼 게 너무 많다'

 

 

 

2010년대부터 신문과 잡 지는 손꼽히는 사양 산업이 되었고,

불안과 무기력이 짙은 안개처럼 업계 전체를 덮쳣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조금 달랐다.

잡지가 망해가는 게 아니고,

세상이 온통 잡지화하는 걸로 보였기 때문이다.

(...)

설사 종이 잡지가 사라진다 해도

정보와 맥락을 다루는 에디터라는 직업은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에디터가 하는 일은

다이내믹해지고 넓어질 거라고.

 

 

 

패션 잡지 단골 기사였던 스트리트 리얼 룩 콘텐츠는 '스타일쉐어'가,

인테리어 집들이 콘텐츠는 '오늘의집'이,

코스메틱 품평 콘텐츠는 '화해'가 서비스로 만들었고,

포털 사이트는 아예 조인트 벤처로 잡지사를 차렸다.

 

 

 

이제 예술적 질문들은

'어떤 새로운 것을 우리가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 미술 비평가 니콜라 부리요 (포스트프로덕션)

 

 

 

삶은 데이터의 축척이 아니라 편집 결과의 축척

 

 

 

홈비디어로 기록한 무편집 영상을 영화라고 부르지 않듯

살아온 모든 순간을 누락 없이 축척한 데이터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삶이 될 순 없다.

중요한 건 자기 서사고, 의미 부여다.

 

 

 

기억이란 우리가 살아온 모든 순간을 공평하게 축척해놓은 결과가 아니라,

우리가 애써 선별한 순간들을 조합해 만들어낸 서사이다.

설령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사건들을 경험하더라도

우리가 똑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지 않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 테드 창 (숨)

 

 

 

지난 20년간 에디터로 일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삶의 자산을 딱 하나만 꼽으라면

'의미의 최종 편집권이 나에게 있다'는 감각이다.

 

 

 

어떤 부분은 주목하고,

어떤 부분은 무시한다.

새로 들어온 정보를 원래의 것과 연결하고,

정보의 공백을 스스로 채워 넣기도 한다.

에디터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뇌 공장에서

'주목-무시-범주화-채워 넣음' 등의 편집 행위가 시시각각 벌어진다.

 

 

 

나는 에디토리얼 씽킹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보대상에서 의미메시지를 도출하고, 그것을 의도한 매체에 담아

설득력 있게 전달하기 위해 편집하고 구조화하는 일련의 사고방식'

 

 

 

챗 GPT가 절대 대체하지 못할 영역은 뭘까?

답은 금세 나왔다.

챗 GPT는 어떤 사안에 대해 개인적 의견이나 입장을 갖지 못한다.

입장이 없기 때문에 주장하지 못하고, 설득하지 못한다.

 

 

 

사전에는 훌륭한 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오만 가지 단어들이 다 실려 있지만,

그 안에는 단 한편의 시도 들어 있지 않다.

- 브루노 무나리 (판타지아)

 

 

 

<뉴욕타임스>는 2020년 5월에 자국의 코로나 사망자가

10만 명에 가까워진 현실을 보도하기 위해 왼쪽 페이지와 같은 1면을 내놓았다.

보통 신문 1면에 실리는 기사, 사진, 그래픽 대신

코로나 바이러스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의 이름으로 지면을 채운 것이다.

(...)

이 상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생각하게 만들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했다.

그래서 뉴스룸 편집자들은 다양한 출처를 통해

코로나19가 사망 원인으로 기록된 부고 기사 및 사망 통지서를 샅샅이 뒤졌고,

수백 개의 신문에서 천 명에 가까운 이름 목록을 찾아 작성했다.

- 앨런 룬드, 81세, 워싱턴, '가장 놀라운 귀'를 가진 지휘자...

- 테레사 엘로이, 63세, 뉴올리언스, 섬세한 핀과 코르사지 만드는 사업으로 유명...

- 코비 아돌프, 44세, 시카고, 기업가이자 모험가...

(...)

그저 이름과 묘사 몇 마디일 뿐인 목록인데,

우리가 겪었던 재난의 실체가 비로소 눈에 보이는 것이다.

 

 

 

중국 현대미술가 아이 웨이웨이는 2015년부터 유럽에 머물면서

난민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꾸준히 촉구해왔다.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국경에 위치했다 철거된 이도메니 난민 캠프에서

버려진 옷가지와 신발을 수집해 베를린 자신의 스튜디오로 가져왔고,

깨끗하게 세탁하고 분류해서 행어에 걸었다.

나는 이 작품 앞에서 난민이 얼굴 없는 집단이 아니라 실재하는 몸을 가진

개별 존재라는 사실을 체험했다.

 

 

 

박혜수 작가의 <Goodbye to Love I>를 보자.

박혜수 작가는 2013년 6월부터 8월까지 헤어진 연인과 관련한

물품과 사연을 기증 혹은 대여받아 <실연수집>이라는 아카이브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옛사랑이 선물한 종이학 1,000마리를 6천 원에 판매한다는

중고 거래 광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면 결코 거래되지 않을 사물.

여기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황금색 종이로 학 1,000마리를 접은 뒤

모두 풀어 하나의 커다란 황금 종이로 이어 붙였다.

사랑도 사라지고, 종이학도 사라졌지만, 종이에 새겨진

'접혔다 펼쳐진 흔적(사랑했다는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다.

 

 

 

막내 에디터 시절,

내가 "하아... (그런 인터뷰이, 그런 상품, 그런 정보를) 못 찾겠어요.

(그러니 기획을 바꿔주세요)"라고 푸념하면 선배들이 그랬다.

"혜진아, 찾으면 다 나와. 세상에 없는 건 없어."

이런 자세로 세상에 뛰어들면 정말로 찾아내는 사람이 된다.

재료가 없다는 핑계는 도저히 댈 수 없게 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말한 것처럼

'우리는 스스로 찾으려는 세계만 발견한다'.

 

 

 

연상을 풍성하게 펼치려면

1. 이것은 무엇으로 이루어졌나?

예) 색종이, 노동력

2. 이것은 어떤 감각적 특징이 있나?

예) 황금색, 복잡한, 가벼운, 구겨진, 바스락 소리, 얇은

3. 이것의 기능과 쓰임은 무엇인가?

예) 사랑 고백, 한물간, 정성의 표현

4. 관련한 인물, 장소, 사물, 작품이 있나?

예) 일본 선수단 라커룸, 전영록 노래, 이모집 선반

5. 동의어, 유의어, 상위어, 하위어, 반의어가 무엇이지?

예) 저비용 고노동, 정성스러운 쓰레기, 정성은 전혀 담기지 않았지만 유용한 선물

 

 

 

칵테일파티 효과 :

산만하고 소란스러운 환경 안에서도

자신에게 중요한 정보를 우선으로 알아보고 선택하는 뇌의 기능

1. 자동차를 새로 구입하면 내가 산 모델이 갑자기 길에 많아진 기분을 느끼는 것

2. 이사를 앞두고 가구를 장만해야 하면 어딜 가도 가구만 눈에 들어오는 것

비슷한 원리로 질문은 지금 내가 어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지 짚어준다.

질문을 품고 있으면 정보는 딸려온다.

 

 

 

언어는 질문하기 위해 창안되었다.

대답은 투덜대거나 제스처로 할 수 있지만 질문은 반드시 말로 해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첫 질문을 던졌을 때부터 였다.

사회적 정체는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을 할 충동이 없는 데에서 비롯된다.

- 에릭 호퍼 (길 위의 철학자)

 

 

 

정보는 사실이 뒤죽박죽 섞여 있는 것이고,

지식은 뒤죽박죽 섞인 사실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 에릭 와이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2009년에 1천 쪽 분량의 <앤디 워홀 일기>라는 벽돌책을 읽고 작성한 원고다.

앤디 워홀이 남겨놓은 자료, 데이터, 작품은 너무 방대했지만,

짧은 글로 분명한 인상을 남기기 위해 네 개의 키워드

1. 기업형 예술가의 시초

2. 반복을 탐험한 사상가

3. 황금 시대의 시민

4. 명성을 사랑한 슈퍼스타

로 정보를 분류했다.

제목은 앤디 워홀이 복수의 페르소나를 가진 아티스트임을 암시하도록

'앤디 워홀에 로그인하는 네 개의 ID'라고 지었다.

 

 

 

설득력감정이입상상력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에디터라면 콘텐츠를 볼 상대방 -클라이언트, 상사, 독자- 입장에서

궁금한 점이 무엇일지 상상할 줄 알아야 한다.

업무용 문서라고 딱딱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앞서 중요하게 설명한 연상 작용처럼 편안한 일상어로 생각나는 대로 끼적이면 된다.

 

 

 

익숙함과 명확함, 낯섦과 모호함이라는 두 원소를 손에 쥐고

목적에 맞춰 적정 배합 비율을 찾아내는 일,

나는 그것이 에디팅의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설득력이 수용자에 대한 상상력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 이걸 본 그의 입장에서 메시지가 동의가 될까?

- 이해가 될까?

- 더 궁금한 점은 없을까?

- 신선하게 느껴질까?

자문하면서 재료와 재료 사이의 거리를 조절한다.

 

 

 

[진열대 1]

바디 워시 - 샴푸 - 컨디셔너 - 핸드 워시 - 로션

위 조합으로 물건을 모으면 진열대 제목을 영락없이

<바디&헤어케어>라고 지어야 할 것이다.

 

[진열대 2]

바디 워시 - 커피 - 3M 소음방지 귀마개 - 책 <글쓰기 좋은 질문 642> - 유칼립투스 오일

나는 <마감을 코 앞에 둔 창작자를 위한 부스터>라고 지을 것 같다.

 

이렇게 관습적인 분류법에서 일부러 멀어져보는 연습을 하다보면

사물(정보)의 의미와 연상 이미지 네크워크를 다각도에서 살피게 되고,

다른 사물(정보)과의 관계를 어떻게 신선하게 맺어줄 수 있을지 궁리하게 된다.

 

 

 

<영화의 콘텐츠 차용 현황과 독창성의 위기>를 읽었다.

2012년에 개봉한 <광해, 왕이 된 남자>는

이반 라이트만 감독이 1993년에 만든 <데이브>와 75% 유사하고,

2011년에 개봉한 <최종병기 활>은

멜 깁슨이 감독한 2006년 작 <아포칼립토>와 79% 유사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표절 아니냐고?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어떤 예술 분야든 기존에 나온 창작물을 모티브 단위로 DB화화면

분명히 유사성을 지닌 작품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올 것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정.말.로. 없는 과잉생산 시대에는

독창성을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아니라

'재배치를 통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능력'으로 봐야 한다.

 

 

 

모든 창작물은 기존의 예술에 영향을 받는다.

거기에 자신의 독창성5-10% 정도 가미한다면 훌륭하고 감사할 일이다.

- 류이치 사카모토

 

 

 

영향을 받은 사람이 딱 한 사람 뿐이라면

세상은 당신을 제2의 누구누구라고 칭할 것이다.

하지만 수백 명을 베낀다면

세상은 당신을 오리지널로 떠받들 것이다!

- 오스틴 클레온 <훔쳐라, 아티스트처럼>

 

 

 

기업을 위한 제안서나 발표 자료를 만들 땐

가상의 독자가 던진 질문을 그대로 소제목으로 써서

청중의 호기심을 모으는 동력으로 쓴다.

 

 

 

"이 콘텐츠를 본 사람이 마지막에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품기를 바라는가?"

라는 질문도 자주 던진다.

- 어떤 감정이 남기를 바라는가?

- 놀라길 바라는가?

-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길 바라는가?

- 부조리에 분노하길 바라는가?

- 잘 쉬었다는 느낌을 얻길 바라는가?

- 긴장감을 느끼길 바라는가?

- 창작욕을 불태우길 원하는가?

 

 

 

데스커의 브랜드 미디어 디퍼의 컨셉을 잡을 때는

- 책상이란 무엇인가?

- 한샘도 아니고, 일룸도 아닌 데스커의 미디어가

어떤 이야기를 건네야 자연스럽고 납득이 될까?

- 도대체 책상이란 뭘까?

- 가구 시장에서 데스커는 어떤 이미지인가?

- 무엇을 책상의 본질이라고 정의해야 데스커다울까?

 

유레카 모먼트는 책상을 '채워지길 기다리는 네모난 빈 공간'으로 정의한 순간 찾아왔다.

 

- 침대나 식탁과 다른 책상의 행동 유도성 :

쓴다, 그린다, 만든다, 계획한다, 배운다, 듣는다, 읽는다,

발견한다, 구체화한다, 도모한다, 생각한다, 실현한다...

- 책상 :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생각이나 잠재력을 현실로 바꾸는 장소 :

채워지길 기다리는 네모난 빈 공간

- 데스커 :

고객이 자기 고유의 콘텐츠를 채워나갈 수 있도록

공간, 여백, 기회의 장을 선물하는 브랜드

- 미디어 컨셉 :

이미 완결된 타인의 인터뷰를 읽는 미디어가 아니라

독자가 스스로 답을 채울 수 있도록 툴킷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미디어

- 디자인 컨셉 :

빈칸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에는

'돌파하는 힘'이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책을 구상하는 초기 단계에

'한국 그림책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야마병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찾은 표현이다.

- 산업의 크기나 성숙도는 부족함이 많은데

- 작가들이 보여주는 깊이와 예술성은 세계 최고 수준인 나라

- 작가로서 극복할 난관이 켜켜이 쌓인 나라

- 그럼에도 꿋꿋한 낙관의 세계관을 담아내는 한국 그림책들

이런 연상 끝에 한국 그림책을 '돌파하는 힘'이라는 말로

개념화할 수 있겠다는 판단.

 

 

 

"내가 보는 OO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며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는 과정에서

컨셉의 단초를 발견한다는 사실

 

 

 

컨셉은 톡톡 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식과 포지셔닝을 위해 필요하다.

 

 

 

컨셉 도출에 가장 필요한 역량은 재치가 아니라 끈기라고 생각한다.

 

 

 

당신이 편집장이라면 각 매체 표지에 어떤 제목을 올리겠는가?

[ 주제 : 인어공주 ]

 

1. 화제성이 중요한 <디스패치> 

- 충격! 인간을 사랑해 목숨을 바친 반라 인어

2. 패셔너블한 이미지가 최우선인 <보그>

- Do For Love, 관능, 용기, 전율의 비극적 로맨스

3. 비즈니스 전망을 다루는 <포브스>

- 이종 생명체 간의 교감, 어디까지 왔나?

 

 

 

장 폴 사르트르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라고 했는데

에디터는 D(Data)와 C(Customer) 사이에서 B(Bespoke)하는 존재'가 아닌가 싶다.

 

 

 

이제는 바이라인의 의미가 다르게 다가온다.

어린 연차 때 바이라인은 자기표현의 일종이었다.

'내가 이런 걸 했어요', '저에겐 이런 능력이 있답니다' 하고 알리는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을 하면 할수록 에디터 업의 아름다움은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로 건너가보는 순간에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제 나에게 잡지 바이라인은 '제 이름을 걸고 당신 생각을 참 많이 했답니다'라고

고백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단행본 책 한 권이 서점 매대에 있을 땐 '상품'

유통 창고에 있을 땐 '재고'

쓰레기장에 있을 땐 '종이류 쓰레기'

공공도서관에 있을 땐 '장서'

작가나 독자의 품에 있을 땐 '작품'

이렇게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정보의 의미를

유연하게 다룰 줄 아는 생각의 힘이 바로 에디토리얼 씽킹이다.

 

 

 

독창적인 관점을 갖고 싶다면

프레임을 의심하고 바꿔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 카페는 새로운 트렌드를 발빠르게 느낄 수 있는 공간이야.

정말 그럴까?

- 카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국 원두 맛이야.

정말 그럴까?

- 편집은 상당히 멋지고 창조적인 삶의 기술이야.

정말 그럴까?

 

 

 

- 카페란 무엇인가?

- 요즘 뜬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 멋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 편집이란 무엇인가?

-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 취향이란 무엇인가?

- 일이란 무엇인가?

대단하고 논리적이고 매끈한 정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다.

사소하고 울퉁불퉁하고 구멍이 숭숭났다 해도 상관없다.

그건 누구의 것과도 같지 않은 당신만의 것이니까.

 

 

 

세상을 보는 당신의 두 눈, 정보를 해석하고 세상과 호응하는 당신의 방식은 귀하고 소중하다.

뛰어나서가 아니다. 화려해서가 아니다. 유일해서다.

당신이 이 세상 누구와도 같지 않은 사람이어서 그렇다.

그러니 부디 질문하기를, 입장을 갖기를, 드러내기를!

 

 

 

첫 기사는 한 신인 영화배우 인터뷰였다.

선배는 수정이 필요한 여러 부분에 빨간 펜으로 첨삭해서

"수고했다"는 짧은 격려와 함께 돌려주었다.

럭셔리 패션지에 어쩐지 나와줘야 할 것 같아 쓴 근사한 형용사마다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그리고 덧붙인 손글씨.

"이런 표피적 인상 말고 너의 해석을 쓰렴."

 

'멋지다'가 인상이라면 '이런 이유로 내가 멋지다고 느낀다'는 해석이다.

선배는 느낌과 인상을 땔감 삼아 지성을 발휘하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이번 원고는 신통방통하게 잘 썼더라. 수정할 것 없어서 교열팀에 바로 넘겼어."

그 두 페이지짜리 기사에는 '나'라는 단어가 아홉 번 들어가 있었다.

 

 

 

언어의 세계에 중립이란 없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권력자의 주관성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익명성가장 무서운 서명이고 객관성가장 강력한 편파성이다.

-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객관성이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객관적 관점이란 각기 다른 인식의 주체들이 '같은 방식으로 보기'로 서로 약속해야 가능하다.

다시 말해 객관성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합의의 결과라는 것이다.

- 김정운 <에디톨로지>

 

 

 

객관은 완전무결한 절대 진리가 아니라 동시대 다수가 합의한 임의적 약속이다.

다수의 합의를 얻는 이유는 여럿일 수 있다. 꼭 합리적인 것도 아니다.

생각이 논리적이고 탁월해서일 수도 있지만,

- 그저 노출 빈도가 높고

- 오랫동안 당위로 여겨졌고

- 명성과 권위의 후광이 있어서일 수도 있다

- 반대로 처음에는 미미했던 누군가의 주관이 끈기 있는 설득으로 객관이 되기도 한다.

1963년 8월, "흑인이 피부색으로 평가되지 않고 인격으로 평가받는 날이 와야 한다"고 외쳤던

한 사람의 목소리는 처음엔 일개 개인의 주장일 뿐이었지만 서서히 주류 집단의 생각으로 자리 잡아

이제는 당당한 지배 규범이 되었다.

 

 

 

결국 설득의 문제다.

주관은 열등하고 객관은 우등한 것이 아니라 모든 건 주관의 산물.

 

 

 

편리함? 좋지. 그런데 진짜 내 기억에는 남질 않아.

- 먼지가 폴폴이는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을 하는 어르신

 

 

 

직업적으로 질문을 달고 사니 역으로 종종 이런 질문을 받는다.

"좋은 질문 만드는 법을 알려주세요"

나도 여전히 모르지만, 기억하려 애쓰는 몇 가지 마음가짐이랄까 태도 같은 건 있다.

1.

'너무 사소한 질문 아닐까', '사적인 질문이라고 기분 상하면 어쩌지', '뜬금없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같은

자기검열을 내려놓고 궁금하다면 일단 묻는다.

주니어 에디터들을 디렉팅하다보면 자신이 진짜 궁금한 내용을 솔직히 묻기보다는

늘 보아왔던 안전한 질문만 나열하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다.

 

2.

상대방이 전제하고 있는 믿음을 가시화해서 되묻는 것

"그림을 어떻게 봐야 잘 이해할 수 있는지 궁금해요"라고 묻는 독자를 자주 만났는데,

이럴 때 머릿 속으로 '아, 이분은 그림을 이해해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구나'라고

얼른 전제와 질문을 분리해 되묻는다.

"왜 그림을 잘 이해하고 싶으세요?"

 

"어떻게 하면 꿈을 찾을 수 있을까요?"도 마찬가지다.

이 질문은 '꿈은 찾는 것'이라는 전제를 딛고 서 있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꿈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빚는 것'이라고 표현하면 안 되나?

그렇게 표현을 바꾸면 시야가 달라지고 당장 취할 수 있는 행동이 달라지는데?

 

3.

사안을 바라보는 위치나 상황적 맥락을 바꾸는 질문을 즐겨한다.

만약에 이 사람이 한국이 아니라 덴마크에서 태어났다면 사회적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을까?

만약에 제작팀 팀장이 아니라 회계팀 팀장이라면 이 아이디어를 어떻게 평가할까?

왜냐하면 우리는 개인이지만 동시에 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니까.

 

4.

'무엇을 했나요?' 보다는 '어떻게 했나요?'를 궁금해하고

'어떻게 했나요?'보다는 '왜 했나요?'를 궁금해한다.

감정과 동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무엇을 했나요?'나 '어떻게 했나요'라고 물으면

인터뷰이는 자신이 겪은 개별 상황을 회고하는 답을 주로 하게 된다.

반면 '왜 했나요?'라고 물으면 인터뷰이는 감정과 동기를 회고하게 된다.

사회적 조건과 경험은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인간으로서 느끼는 감정과 동기는 부유하든 가난하든

나이가 많든 적든 별반 다르지 않다. '왜 했나요?'라고 물으면 감정의 공유지가 열린다.

 

5.

'내가 그였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상상하고 묻는다.

그다음 '내가 독자라면 무엇이 궁금할까?' 상상하고 묻는다.

취재원과 독자 모두에게로 건너가보는 상상을 하면서

중간에서 둘을 어떻게든 이어주려고 안간힘을 쓴다.

 

 

 

마음을 끄는 인물화를 만나면 프레임 안으로 발을 쑥 집어넣고

저쪽 편으로 건너가 그림 속 사람들 자리에 서보곤 했다.

 

 

 

그때는 시각적 영감이 필요하면 회사 도서관이나 수입 잡지 전문 책방에 가서

일일이 책장을 넘기면서 쓸 만한 자료를 찾아내야 했다.

찾고 싶은 이미지를 만날지 만날 수 없을지 모르는 상태로 수십 권의 참고 자료를

들춰보았고, 그 과정에서 원래 의도치 않았던 페이지들까지도 감상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페이지의 흐름과 리듬감, 다양한 레이아웃의 효과 등을 익히고 배웠다.

효율성 측면만 본다면 핀터레스트는 축복이지만, 생각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 채로

하염없이 스크롤을 내리면서 좋아 보이는 이미지 사냥만 하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면

찬물을 흠뻑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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