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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본문
참으로 교양있는 21세기 우리 사회에서는 '잘 참는게' 미덕이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학습되어 왔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의 무모한 말에, 무례한 태도에 적절한 대처를 하지 못했다.
"참는 게 이기는 것이다"
"지는 게 사실 이기는 거야"
결국 참는 사람, 참지 않는 사람 모두 "승리"하는
이상한 정신승리 논리를 펼치면서 말이다.
2019년 여름.
첫 취업으로 상경 했던 때, 모친보다 한 살 어린 대표는
결국 내 안에 내재되어있던 봉인된 화를 터트렸다.
나는 도대체 무엇에 그렇게 화가 났을까?
여러 에피소드가 있었지만 하나의 공통점을 꼽자면,
대표는 본인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고집이 있었다.
그것이 프로젝트 회의건, 사적인 대화건 대립되는 의견에 대해서
본인의 주장이 반드시 이겨야만 끝이 났다.
그래서 프로젝트 리뷰도 시작됐다 하면, 기본적으로 3시간은 생각해야 했다.
첫 회의 때를 잊지 못한다. 그가 내게 먼저 의견을 물었고,
그 의견은 대표와 반대되는 의견이었다. 조심스럽게 겨우 한마디 꺼낸 것에
그는 역정을 내며 내가 "틀린 사람"이라는 것을 개껌처럼 물어 뜯었다.
'갑자기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거야?'
된통 비말을 뒤집어 쓴 나는 그날 이후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의 고집은 직급을 막론하고 날개를 펼쳤기에 나 한 사람 조용한다고 해서
빨리 끝날 회의가 아니었다. 대표는 '내 말이 곧 정답'이어야 했다.
그러니 업계에 잔뼈가 굵은 선배라해도 그의 의견에 딱히 신뢰가 가지 않았다.
대단한 논리에 설득되는 것이 아니라 고집으로 결정되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래, 당신 뜻대로 하자. 당신은 회사의 흥망성쇠에 대한 부담을 모두 떠안은
총 책임자니까'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가 첫 회의 이후 나의 아침 출근 인사를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출근할 때 한 사람씩 눈 맞추며 인사를 잘 했었는데, 그 날 이후로 정확히
나의 시선만 피한 채 인사를 했다.
'나의 착각이겠지. 설마 그 나이에 그 정도로 속이 좁을 수 있겠나' 했지만 그게 1년 간 지속되었다.
오죽하면 그날 회의의 녹음본이 있었더라면, 그것을 온 세상에 공개해 읍소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으니.
그 때 나이 겨우 스물 일곱. 아버지 뻘 되는 아들을 거두는 기분이었다.
그는 점점 나에게 새로운 불만을 표하기 시작했다.
"막내가 말이 없다", "막내가 생긋생긋 웃으며 분위기를 띄울 줄 알아야지"
언젠가는 옷에 대해 지적을 했다.
"옷은 왜 이렇게 편하게 입냐. 네가 불편하게 입고 오고, 내가 너한테 편하게 입으라고 말하는 게 맞는 거야."
내 옆자리엔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리털이 훤히 보이는 반바지를 입은 상사가 잠자코 앉아 있었다.
후드티를 입은 나는 한계에 다다랐다.
"근로계약서에 자율 복장이라고 쓰지 않으셨어요?"
미팅이 있던 날도 아니었고, 회사에 손님이 찾아오지도 않았다.
나는 새벽 4시 논현역 전봇대를 붙잡은 사내처럼 내 생각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해고를 각오했다. 아마 이때부터 였을 것이다. 비겁해지지 말자.
돈 앞에서, 권력 앞에서 비겁한 인간이 되지 말자는 다짐을 말이다.
우리는 단 둘이 그렇게 3시간 가량 설전을 벌였다.
'정말이지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평행성 같은 사람도 있구나'
결국 내가 졌다. "네 알겠어요"
져준 거라 내가 이겼다고 말해야 하나. 이날 이후 설전은 두 세 차례가 더 있었다.
이 사람이 부리는 생떼를 어떻게든 적나라하게, 수치스럽게 박살내고자 하는 분노가 일었다.
그때 김재규가 떠올랐다. 책상을 박차고 올라가 소리 치며
"대표님, 경영을 좀 거국적으로 하십시오!" 하고 사표를 집어 던지는 상상을 했다.
설렘으로 물든 나의 첫 취업은 일 년만에 새까맣게 얼룩졌다.
신경질을 내는 사람,
생각을 강요하는 사람,
본인이 정답인 사람,
기본적인 소양이 없는 사람 등
화를 나게 하는 다양한 사람이 있다.
첫 퇴사를 하고 나선 이렇게 생각했다.
"찰나와 같은 삶에서 무얼 더 참고 살아야 하나"
"부당함에 대해 비겁하게 피하지 말자!"
"당당히 화 내자!"
두 번째 직장에서도 응당 필요한 화를 내며 살았다.
그것은 시원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여러모로 에너지 소모가 컸다.
지금 와서 다시 드는 생각은
화를 참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아니라,
화를 낼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회진을 돌면 어떤 분은 감정이 격해져서 아침에 받은 우유팩을 던져요.
그러면 우유를 뒤집어 쓰기도 하는데 사실 정신과 전문의들은 화가 안 나요.
화가 안 나는 이유는 인간적으로 대단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 환자분이 가지고 있는 질병을 많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질병의 증상과 그 병의 원인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저희들은 언제나 어떻게 배우냐면 최고의 공감은 잘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오은영 박사님의 에피소드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든 인류는 '환자'다.
어디 아픔 없는 사람이 있겠나.
환자복을 숨긴 채 살아가는 우리 서로의 알 수 없는 상처를 이해하자.
누군가 칼춤을 춘다 한들 화를 내서 달라질 것 없다.
'그래, 너도 아픈 사람이지'
화를 내지 않을 수 있을 때, 상대에게 거절 내지 반대 의견을 전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