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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떠나온 디자인 (밑줄맨-2023) 본문
디자인은 나의 오랜 치부다.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일했지만, 만족스러운 결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춘의 전부를 들인 일이었기에 '좋은 경험이었다'라며 웃어넘길 수 없었다.
딱 한 번 용기내어 엄마에게 미대 진학을 얘기했다.
형편이 어려워서 지원할 수 없다는 말은 예상했던 바라 아프지 않았으나
그 다음 말은 두고두고 가슴에 남았다.
"네가 그림을 그려봤자 얼마나 그린다고.
그냥 만화 조금 따라 그리는 정도잖아."
그래도 행동하는 나는 생각하는 나보다 언제나 강했다.
끝내 낙서를 멈추지 않은 것이다.
비록 전문대였지만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을거란 기대로
내 마음은 한껏 부풀어 하늘 위로 두둥실 떠올랐다.
매체에서 자신의 작업을 설명하는 디자이너들의 눈빛에서는
모종의 확신과 애정이 읽힌다.
나는 어떠한가. 내 디자인을 보면서 할 수 있는 말이 변명밖에 없는 것 같다.
'이게 결국 이렇게 됐네요' 하고.
오랜만에 아직 하늘이 훤할 때 퇴근한 날이었다.
모처럼의 칼퇴근이니 운동이나 가볼까 하고 헬스장 문 앞까지 갔다가
갑자기 너무 서러워 입구 옆에 주저앉았다.
운동을 할 수 없어서 서러웠던 게 아니라 내게 중요한 것들을 포기하면서까지
일에 매달렸는데도 발전이 없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그날은 결국 사이클 위에 앉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내 야망의 원천은 무지였다.
바라던 큰 조직에 들어왔는데 막상 업무를 시작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계속 겉돌았다. 예전 회사에선 입 꾹 다물고 일만 해도 괜찮았지만,
지금은 적당히 회사 사람들의 잡담에 끼어들어 맘에도 없는 소리를 해야 했다.
날씨가 좋으면 좋다고, 나쁘면 나쁘다고 얘기해야 했고,
보지도 않는 티브이 프로그램과 연예인의 가십에도 관심 있는 척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한동안 그런 분위기를 읽지 못해 일하는 시간에 정말로 일만 하다가 상사에게 불려 가기도 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하고 있으면 너도 좀 거들어."
나름 업무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자 딴짓하지 않고 일만 했을 뿐인데
오히려 그런 태도가 내 평판을 더 떨어뜨렸다.
같은 프로젝트에 여러 명이 달라붙어 일한다는 건
나를 도와줄 사람이 생기는 것이자 경쟁자가 생기는 것이었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남의 시안을 보조하는 위치로 강등되었는데
그 기분이 꽤 굴욕적이었다.
아이디어의 세계에는 선후배가 없었다.
사원은 대리를, 대리는 과장을 상대로 경쟁했다.
점심시간이면 밥을 후다닥 먹고
근처 카페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앉아 가쁜 숨을 돌렸다.
작은 케이크를 먹으며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진 다음
숨 막히는 회사로 돌아가 심란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았다.
다른 직원을 매일 같이 씹어대는 동료의 불평불만에 맞장구치는 것 역시
보통 일이 아니었다. 험담을 싫어하는 도덕적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그저 말을 좀 그만 듣고, 그만하고 싶었다.
대학 졸업이 다가올 무렵 부모님은 내가 고향으로 돌아오길 원했다.
취업 때문에 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이렇게 대꾸하셨다.
"내려와서 간호조무사 학원 같은 거 다녀볼래?"
졸업 전에 직장을 구하지 못하면 꼼짝없이 고향으로 돌아가야 하는 형편이었다.
어디든 어떻게든 들어가야 했다. 다행히 교수님의 추천으로 선배가 일하고 있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말이 좋아 광고 회사이지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현수막, 간판, 전단, 명함을 만드는 곳이었다.
그래도 학교 선배가 있고 교수님이 추천한 곳이니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입사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이상한 회사였다.
계약서 한 장 없이 일했고 사대보험도 가입시켜 주지 않았으며 주 6일 출근했다.
월급은 세금 한 푼 떼지 않은 100만 원이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그게 이상한 일이란 걸 몰랐다.
오히려 마냥 좋았다. 적어도 고향 집으로 잡혀가는 최악의 상황은 막았으니까.
그때는 밤새 혼나면서 실무를 배우는 친구들이 너무나 부러웠다.
내가 하는 디자인이 꼭 가짜인 것만 같았다.
첫 직장이니까 2년은 채워야 해.
쉽게 회사를 갈아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곳이 아닌 것 같은 의구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사이 2년이 흘렀다.
공교롭게도 2년 만에 회사가 망하면서 자연스럽게 새로운 직장을 찾게 되었다.
포트폴리오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의 작업물을 살펴보는데 학교 다닐 때 했던 것이
실무 작업물보다 많았다.
여전히 학생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는 생각에 이대로는 안될 것 같아서
포트폴리오 관련 강의를 들었다. 강의가 끝나고도 강사를 붙들고 이것저것 물었더니
그가 따로 시간을 내어 카페에서 대면 상담을 해주었다.
그는 부족한 실무작업의 공백을 학생 시절의 작품보다는 개인 작업물로 채울 것을 권했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사장님은 나의 포트폴리오에 대해 이렇게 총평했다.
"참 재미없는 일을 어떻게든 재밌게 해보려고 노력한 티가 나네요."
지금 생각해 보면 전국의 디자인과에서 자행되는 밤샘 작업 문화는
졸업생들이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겪게 될 부당한 노동과 야근에 익숙해지게끔 하기 위한
일종의 세뇌 교육이었던 것 같다.
일로 그림을 그리면 그림도 나를 떠나갈 것 같았다.
디자인이 나를 떠나갔듯이.
왜 디자인 때문에 모든 창작을 포기하려 했을까.
나의 책과 그림은 참 안 팔린다.
그런데도 초라해진 기분이 들지 않으니 이상한 일이다.
디자인은 내게 무려 돈을 주었는데도 언제나 공허했다.
자기 손에 들어온 이상 후지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일한다.
디자이너가 이렇게 일한다는 사실을 사회 전반이 이해할 수 있다면
훨씬 더 가치 있는 일로 인정받지 않을까.
후배와 함께 야근하던 중이었다. 나는 새 시안을 짜느라 골머리를 앓고 있었고
그 친구는 나를 도와 간단한 잡무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까지 진행됐는지 확인하러
자리에 갔더니 유튜브 화면을 작게 띄워놓고 작업 중이었다.
"유튜브 꺼. 네 상사도 작업 창만 보면서 일하고 있는데 네가 지금 그런 걸 보고 있을 때야?"
이미 전철마저 끊긴 새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도 아닌일인데 왜 그랬을까.
월급 더 받는 내가 더 많이 일하는 게 당연한 데다 입사 둘째 날부터 수당 없는 야근 중인 후배에게
그렇게까지 가혹할 필요가 있었을까. 더군다나 앞으로도
같이 일할 마음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빠르게 집에 돌려보냈어야 했던 게 아닐까.
'나도 사람인지라' 새벽까지 일하다 보니 감정이 앞선다는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감정이 상사에게는 잘도 숨겨지는 걸로 보아 그건 변명의 여지 없는 꼰대 짓이었다.
폭력은 대물림된다던데 어쩌면 나 또한 선배들에게 배운 언행을 자연스럽게 습득한 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애꿎은 사람에게 화풀이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존심 때문에 사과조차 못 했으니
그가 나를 '배울 것 없는 초짜 선배'라고 생각한대도 할 말이 없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후배는 3개월의 수습 기간을 채우고 회사를 그만뒀다.
퇴사 날 저녁에 그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왔다. 덕분에 많이 배웠고 감사했다는 내용이었다.
비록 경력은 부족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나보다 더 성숙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의 꼰대 짓은 그토록 치기 어린 것이었다. 만년 막내였던 나야말로 잠시나마 후배의 존재에
큰 위안을 얻었으니 그에게 감사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직 때마다 연봉을 올리던 호시절이 지나고 유리천장 바로 아래에 머리를 찧는
30대 기혼 여성이 되어있었다.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남편의 승진과 연봉에 별로 관심이 없다.
같이 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내 것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매일 얼굴을 보고 일상을 함께하는 사이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음 깊은 곳의 열등감과 질투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다.
가끔 디자인하며 만났던 '결혼과 동시에 일을 그만둔 디자이너'들의 행방에 대해 생각한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디자인을 계속하고 있을까? 다들 어디로 간 걸까?
내가 바란 건 디자인을 계속해서 더더욱 잘하게 되는 것이었다.
잘해서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도 없었고 심지어는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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