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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운 (김애란-2012) 본문
인기가요 1위를 한 아이돌이 오랜 연습생활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린다.
그래 힘들었고, 뼈를 깎고, 피눈물을 흘렸으리라.
그들을 비추는 카메라 뒤엔 그늘이 하나 있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한 씽크홀 말이다.
그 속엔 사람의 테두리를 잃어가는 연습생들을 셀 수 없다.
더 치열하게 했어야지. 같은 시간이라도 더 집중해서 했어야지.
다양하게 했어야지. 새로운 시도를 했어야지.
볕들지 않는 쇠창살 안에서 눈부신 태양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당신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나오는 길을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정답이 없다면 그냥 내버려 두시라.
오늘도 비천한 성냥 한 개비 찢는 소리만 어둠을 메운다.
(너의 여름은 어떠니)
나는 지금껏 선배처럼 이상적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
존경도 하고, 말벗도 하고, 괜찮다면 잠도 같이 자고 싶은 사람.
혹 요사스런 성적 취미가 있다 해도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만
나는 복종이 좋아요'라고 말하며 눈 딱 감고 따라가보고 싶은
그런 상대 말이다.
지금도 나는 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라는 식물의 방어 물질에
사랑의 묘약이 섞여 있다고 믿는 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학기의 그 많은 청춘이 그렇게 동시에 상기된 채 해롱댈 수는 없는 일이다.
번식기의 젊음이 내뿜는 에너지는 은근하며 서툴렀고
노골적인 동시에 싱싱했다.
내 우울이 마음에 들었으며, 심지어는 누군가 그걸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환영식 날, 잔디밭에 모인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내가 거기 없다는 걸 통해, 내가 거기 있단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버리는 것 같아요.
"이 사진 좋다."
선배가 '일시 정지' 단추를 눌러 슬라이드 쇼 상태에서
자동으로 넘어가는 사진을 멈추게 했다.
"난 싫은데."
"왜?"
"이 가방 때문에요. 옷이랑 너무 안 어울리잖아요. 다리도 굵게 나오고."
나는 황토색 인조가죽 가방을 가리키며 투덜댔다.
당시 내게 하나밖에 없던 가방이라 아무 옷에나 줄기차게 들고 다닌 거였다.
"난 저 가방 때문에 이 사진이 좋은데."
선배가 모니터를 응시하며 말했다.
"에? 왜요?"
선배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여자의 '생활'이 보여서."
"......"
나는 푸른 불빛에 얼비친 그의 옆얼굴을 가만 바라봤다.
그리고 이제부터 이 사람을 본격적으로 좋아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세상에 내 사진을 보고 그렇게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선배밖에 없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쨌든 우리는 자주 모여 놀았다.
대부분 장사를 하는 부모님 밑에 자라, 해거름까지는 어떻게든
밖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가야 했다. 당시 신나는 폐활량을 떠올리면
지금도 개운한 기분이 든다. 편을 가르고, 규칙을 익히고, 보잘것없는
어휘력으로 열심히 말싸움을 하고, 토라져 집에 가기도 했지만.
언젠가 최대한 멀리 나가려 도움닫기 해 올라탄 그네 위에서,
터질 듯한 가슴을 안고 깨달았더랬다.
'자란다는 것, 기분 좋은 일이구나.'
"느이들 사람들이 사막에서 뭐로 제일 많이 죽어나가는 줄 아냐?"
민수가 한 손으로 안경을 치켜 올리며 자신 있게 답했다.
"거야 열사병이지."
병만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아니야. 익사야, 익사."
아이들이 일제히 '뭐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쟤가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뻥을 치나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병만의 말은
뜻밖에 청산유수였다. 사막에는 비가 잘 안 오지만 한 번 오면
엄청나게 쏟아지기에 사람들이 갑자기 변을 당하게 된다고.
일반인들은 보통 사막에 비가 올 거라 생각지 못할뿐더러
비를 피할 곳도 마땅찮기 때문에 속절없이 당하게 된다는 말이었다.
내가 살아 있어, 혹시 사는 동안, 누군가가 많이 아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곳에서, 내가 아는, 혹은 모르는 누군가가
나 때문에 많이 아팠을 거라는 느낌이. 그렇게 쉬운 생각을 그동안
왜 한 번도 하지 못한 건지 당혹스러웠다.
(벌레들)
우리의 맨살이 닿을 데라 생각하니 대충 할 수가 없었다.
401호는 과다하게 뿌려진 산성세제에 푹 절어 있었다. 걸레질을 하는 남편과
내 얼굴에서 콧물과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냉장고와 싱크대 청소,
창문 닦기, 현관 정리 등 자잘한 일을 해치우고 나니 새벽 4시가 넘어 있었다.
우리는 쓰레기봉투를 묶고, 손을 씻고, 물을 마셨다. 그러곤 극도의 피로감
속에서 약속이나 한 듯 싱크대에 몸을 기대 서둘러 몸을 섞었다.
고요는 오존층처럼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투명한 막 같은 거였다.
물이나 햇빛처럼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산달이 가까워지며 잠자리를 거의 갖지 않았지만 우리 부부는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물론 연애 시절의 긴장과 절박함을 덜했다.
하지만 서로의 몸이 물처럼 편안하게 섞여지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자리끼를 찾듯 머리맡을 더듬다 그냥 그렇게 엉켜버리는 관계.
아찔하게 파도를 타는 게 아닌 깊은 물속을 유영하는 식의, 평범하고
아득한 정사.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몸을 탐하고 서로의 몸에 의지했다.
애벌레는 급한 소식을 갖고 온 전령인 양 금방이라도
들어올 것처럼 버둥댔다.
처음엔 벌레를 치우지 않고 그냥 둘까 했다.
남편에게 보여주고 그 동안 내가 엄살을 부린 게 아니었다는 걸
납득시키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저렇게 흉측한 벌레와 상대했다는 걸,
게다가 죽이기까지 했다는 걸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임신 후 성적 매력이
떨어지고 있다는 자격지심도 한몫했다. 결국 벌레를 치워버리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작대기 같은 걸 이용해 밖으로 떨어뜨리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저 아랜 쓰레기장이니까. 죽은 벌레뿐 아니라 산 벌레도 득실거리는
곳이니까. 삐걱삐걱 조심스레 방충망을 열었다. 지난번처럼 방충망이 문틀에서
떨어지는 사태를 막기 위해 조금씩 옆으로 밀어가며, 주먹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너비에서 멈췄다. 싱크대 서랍에서 나무젓가락 한 벌을 꺼내 왔다.
최대한 젓가락의 끝 부분을 잡고 벌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젓가락이
막 그것의 털에 닿은 순간, 애벌레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나는 젓가락을
놓치며 비명을 질렀다. 애벌레는 상체를 세워 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아악!"
두 팔을 휘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동시에 허둥대는 내 손짓에 치어
수납장 위의 반지 케이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몇 달 전부터
손에 안 맞는 결혼반지를 넣어둔 파란색 벨벳 상자였다.
벌레는 그 자리에 픽 쓰러졌다. 그리고 A구역을 향해 스스로 고꾸라져버렸다.
'......'
A구역은 세상만사를 삼킨 심연처럼 시커먼 아가리를 벌린 채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곳은 한없이 깊고 어두워 보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 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전등을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충격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벌레들이
행로를 바꿔 일제히 내게 몰려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본능적으로
집에 가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몸이 맘을 듣지 않았다.
'움직여, 움직이라고.'
온몸의 관절과 근육에게 명령을 내렸다. 이상하게 다리가 꿈쩍하지 않았다.
얼빠진 얼굴로 양다리 사이를 바라봤다. 사타구니에서 오줌처럼 뜨듯한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양수가 터진 거였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였다.
'휴대폰......'
그때서야 집에서 급하게 나오느라 휴대전화를 챙겨 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머리가 하얘지는 기분이었다. 고개를 숙여 뻣뻣해진 하체를 속절없이 바라봤다.
신발 안은 이미 질척해져 있었다. 아랫도리에서 극렬한 통증이 전해왔다.
"헉!"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깨진 콘크리트 조각이 무질서하게
쌓여 있는, 봉긋한 무덤 같은 곳에서였다. 그 봉분에 허리를 기댄 채 다리를 벌리고
누웠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소리는 허공 위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있더라도, 새벽 1시에, 아무도 없는 재개발지역의 건물 잔해 위에서, 다리를 벌리고
있을 임산부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아랫배가 얼얼하고 현기증이 났다.
너무 아파서 토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번 더 죽을힘을 다해 외쳤다.
"살려주세요."
멀리 가림막 너머로 자동차 소음이 들려왔다. 그건 마치 누군가 일부러 퍼뜨린
질 나쁜 소문처럼 A구역을 한 바퀴 휘감고 사라졌다 다시 나타났다. 단지 장막
한 장이 드리워졌을 뿐인데, 그 소리가 너무 아득하게 느껴져 울음이 날 것 같았다.
아랫도리에서 칼로 에는 듯한 고통이 전해졌다. 나느 힘주어 콘크리트 조각을 쥐었다.
멀리 보이는 장미빌라는, 모텔과 교회는, 아파트는 여전히 평화로워 보였고,
나는 이 출산이 성공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물속 골리앗)
장마는 지속되고 수박은 맛없어진다. 여름이니까 그럴 수 있다.
전에도 이런 날이 있다. 태양 아래, 잘 익은 단감처럼 단단했던 지구가 당도를 잃고
물러지던 날들이. 아주 먼 데서 형성된 기류가 이곳까지 흘러와 내게 영향을 주던
시간이. 비가 내리고, 계속 내리고, 자꾸 내리던 시절이.
말하자면 세계가 점점 싱거워지던 날들이 말이다.
천 개의 잎사귀는 천 개의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천 개의 방향은 한 개의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장맛비가 내린 그 며칠은 내 생애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
마음이 그랬다는 게 아니다. 집에 전기가 나가서였다.
여름은 평소 우리가 어떤 냄새를 풍기며 살아왔는지 환기시켜줬다.
지상에 숨이 붙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모든 체취가
물안개를 일으키며 유령처럼 깨어났다.
변기 속, 구멍을 타고 회오리쳐 사라지는 오물을 보고 있으면,
새삼 물에 잠긴 도시란 게 얼마나 더럽고 역겨운 곳일지 그려졌다.
자연은 자연스럽지 않게 자연이고자 했다.
예상하지 말라는 듯, 예고도 준비도 설명도 말며 납작 엎드려
있으라는 듯, 네 조상들이 했던 것을 너희도 하라는 듯 난폭하게 굴었다.
그것등른 대부분 한쪽 팔이 길었다.
그래서 마치 한쪽 편만 드는 십자가처럼 보였다.
바닥을 보이지 않는 허기가 둘레를 넓혀가며 내 몸을 파먹었다.
나는 그게 무슨 색인지 몰랐지만 '기도서의 색'이라는 말만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이내 불쾌해져 기도가 그렇게 푸를 리 없다고.
내가 아는 기도는 세상에서 가장 비천한 색을 지녔다고.
닳고 닳아 너절해진 더러운 색이라며 화를 냈다.
나는 좀더 적극적으로 사이다를 들이켰다. 컴컴한 입에서 작은 불꽃놀이가
일어나는 느낌과 함께 살짝 매캐한 눈물이 났다. 어둠 한가운데서
알전구를 씹어 먹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 몸속에서 환하게
타올랐다 이내 사그라졌다. 그러자 문득, 아버지의 보호안경 위로 비쳤을
용접 불꽃이 떠올랐다. 아버지가 평생 마주한 불빛, 불빛. 그리고 내게
다른 빛을 보여주려한 아버지의 마음도.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바람은 자기 몸에서 나쁜 냄새가 나지 않을까 염려하는 노인처럼
주춤거리며, 저도 모르게 물컹해져, 저도 모르는 봄 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질 나쁜 녹음 환경 때문에 잡음 섞인 이국 말은
실제보다 더 먼 곳에서 오는 무전음처럼 절박하게 들린다.
웃을 땐 하얗게 웃고 죽을 땐 까맣게 죽어간 여자.
도시 곳곳에는 한쪽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은 뒤,
술에 취해 아름답고 어그러진 말들을 차비처럼 내려놓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때론 두서없고 엉뚱한, 어느 때는 철렁하고 알 수 없는 말들을
반짝이는 동전처럼 흘리고 가는 이들이.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
살림을 차린 후, 용대와 명화는 수중의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반지하에서 살만 섞었다. 열에 달뜬 청춘처럼 새삼스럽게.
늙은 추방자들처럼 절박하게 말이다.
작대기로 때려도 절대 떨어지지 않는 뱀처럼 완강하게 서로 엉켜있었다.
넓고 장사가 안 되는 오리 고깃집에선 끝까지 남은 젊은 남녀가
천천히 섹스의 가능성을 재고 있다.
(하루의 축)
기옥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켰다. 순간 메마른 형광등 아래로
한 가계의 남루와 수치가 한꺼번에 드러났다. 취향도 계통도 없이
어지러이 놓인 세간도 그렇고 애석하다 못해 어딘가 참혹한 느낌을
주는 기옥 씨의 머리도 그랬다.
창밖에서 익숙한 기계음이 났다. 용역 업체의 오토바이가 한겨울 사냥 나온
개처럼 가쁜 입김을 내뿜으며 가르랑거리는 소리였다.
골목에서 한 노인이 오토바이 뒤 칸에 쓰레기봉투를 싣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음식물 종량제 쓰레기봉투에서 새어 나온 구정물 냄새가
청량한 새벽 공기를 타고 기옥 씨네 집까지 들어왔따. 간밤, 잠을 설친 도시가
찌뿌둥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내는 구취였다.
이윽고 기옥 씨의 흰 머리카락이 쪼르륵- 하수구 속으로 회오리쳐 나갔다.
도시의 한산했던 도로 위론 어느새 피가 돌듯 차가 회전했고......
정차된 항공기들은 모두 앞바퀴에 턱을 괸 채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나라에서 불어와 어떤 세계로 건너갈지 모르는 바람이었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쉴 새 없이 오가는 공간에서 바로
그 '드나듦의 흔적'을 없애는 것. 이것이 공항 청소의 핵심이었다.
기옥 씨에게는 요즘 그런 게 필요했다. 때가 되면 중년들이 절로 찾게 되는
글루코사민이나 감마리놀렌, 혹은 오메가3처럼...... 몸이 먼저 알아채
몸이 나서서 요구하는 것들이. 이를테면 설에는 떡국이, 보름에는 나물이,
추석에는 송편이, 생일에는 미역국이, 동지에는 팥죽이 먹고 싶다는 식의.
그래야 장이 순해지고, 비로소 몸도 새 계절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 같다는,
어느 때는 너무 자명해 지나치게 되는 일들이 말이다.
제사는 조상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지내줘야 했다. 기옥 씨는 음식으로
자기 몸에 절하고 싶었다. 한 계절, 또 건너왔다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고.
'왜 이렇게 단가...... 이렇게 달콤해도 되는 건가......'
바람이 불자 기옥 씨의 브래지어 위에 핀 가짜 꽃들이, 이름을 알 수 없는
이국의 열대 식물이 휘청대는 느낌이 들었다. 기옥 씨의 얼마 안 되는
머리카락도 힘없이 흩날렸다.
(큐티클)
"자, 다시 갑니다. 친구분 좀더 적극적으로 받아보세요.
이제 찍습니다. 하나, 둘, 셋."
나는 겨드랑이 얼룩을 들키지 않으려 이번에도 소극적으로 움직였다.
내가 몇 번이나 부케를 놓치자 신부가 당황하는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촬영이 지연돼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혹 예식에 부정이라도 탈까
미안했다. 그러니 다시 신호가 오면 허공에 몸을 던져서라도 튤립을
받아내는 수밖에 없었다.
"자, 다들 여기보세요. 마지막입니다. 친구분 준비하시고.
신부, 던지세요! 하나, 둘, 셋."
'찰칵-'
순간 사진기에 포착됐을 내 모습이 머릿속에 절로 그려졌다.
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만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예쁜 손톱이었는데 정작 하객들은 내 겨드랑이에
생긴 커다랗고 우스운 얼룩만 보고 말았다. 앞으로도 그들은 나를
그렇게 기억하게 되겠지. 땀 흘리는 여자......
땀을 아주 많이 흘리는 여자...... 나는 부케를 꽉 안으며
울상 진 채 활짝 웃었다. 하객들의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가 오랫동안 들려왔다.
그렇게 오래 여행 가방 옆에 있자니 어쩐지 우리가 떠나온 사람
떠나갈 사람이 아니라 멀리 쫓겨난 사람처럼 느껴졌다.
(호텔 니약 따)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어둑한 술집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우며 지적이고 허세 어린 농담을 주고받다 봄 세상이 조금 만만하게
느껴지기도 했는데, 어느 날 자리에서 눈을 떠보니 시시한 인간이 돼 있던 거다.
아무것도 되지 않은 채. 어쩌면 앞으로도 영원히 이 이상이 될 수 없을 거란
불안을 안고.
아울러 은지와 서윤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 가장 빛나는 것을 이제 막
잃어버리게 될 참이라는 것을.
은지는 언제나 그래 온 것처럼 인생을 굴러가게 만드는 건
근심이 아니라 배짱임을 믿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식은
두려움을 깔보는 거라고. 실은 본인도 믿지 않는 주문을 외워가며 말이다.
6년째 사귀어온 남자친구가 서윤에게 이별을 고했다.
결혼 이야기만 빼놓고 모든 이야기가 오갔던, 서윤이 가족처럼 여겨온
사내였다. 서윤은 일주일간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러곤 방 안에
틀어박혀 누구도 만나지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잠만 잤다.
'넌 내 어디가 좋았어?'
'응, 그냥 열심히 사는 게 보기 좋았어.'
'뭐라고?'
'아냐, 아냐, 으하하.'
찧고 까분 게 엊그제 같은데 갑자기 그게 농담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에 바다와 하늘만 있는 줄 알았는데,
면세점이 있었다.
소리에도 겹이 있다는 것. 좋은 스피커를 통과한 소리는
음악이 아니라 건축이 된다는 것. 그것도 그냥 건물이 아니라
대성당이 된다는 걸 서윤도 어렴풋이 경험해봤기 때문이다.
"너 나 만나서 불행했니?"
그러곤 곧장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저쪽에서 긴 침묵이 이어졌다. 초조해진 서윤이 황급히
변명하려는 찰나 경민이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따.
"아니"
"......"
"그런 거 아니었어."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 게 지겨운 거였어."
(서른)
저는 지난 10년간 여섯 번의 이사를 하고, 열 몇 개의 아르바이트를 하고,
두어 명의 남자를 만났어요. 다만 그랬을 뿐인데. 정말 그게 다인데.
이렇게 청춘이 가버린 것 같아 당황하고 있어요.
그동안 나는 뭐가 변했을까. 그저 씀씀이가 좀 커지고, 사람을 믿지 못하고,
물건 보는 눈만 높아진, 시시한 어른이 돼버린 건 아닌가 불안하기도 하고요.
이십대에는 내가 뭘 하든 그게 다 과정인 것 같았는데, 이제는 모든 게
결과일 따름인 듯해 초조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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