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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다. "너는 왜?"라는 질문을 품은 자들의 한계는 그들 경험의 척도이다. 그 질문을 받는 자는 이 세상의 새로운 씨앗임에 불분명의 여지가 없다. 그림이라는 도구로 그의 삶이 하나의 증거가 되었다. 삶은 나를 찾아 떠나는 길. 우리는 각자가 나를 찾아 떠나고 있는 것인가, 나를 떠나고 있는 것인가. 죽음 앞에서 잃어버린 나를 바라볼 때면 타인의 생각이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그러니 그만 그 우매한 생각들을 멈추시라.
만들어진 사회는 특출난 누군가의 혁명이 아니다. 인류의 자연스러운 형성에 불과하다. 일개 인류의 풍경에 불과한 나는 어떤 역할로 포지셔닝 되어있을까.
사람과 사람은 잘 맞지 않다. 함께하는 시간이 잦고 오래될수록 서로는 이를 더욱 실감한다. 관계에 있어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사랑이 가장 쉽게 분열된다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조금이라도 더 함께 있고 싶다는 욕심으로 인간으로서 유지해야하는 최소한의 선을 넘게 되고, 이내 곧 당혹스러움을 피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나의 이상적인 결혼관은 첫 째, 두 사람의 관계를 국가가 침범할 수 없도록 한다. 혼인신고를 하지 않는 것이다. 둘 째, 주거형태는 같은 지붕 아래 분리된 공간으로, 서로에게 이웃이 되는 것이다. 화장실이 어떻다, 빨래가 어떻다.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에 대한 피드백이 연애하던 때 서로에게 주고 받던 우려 정도에 머무르는 것이다. 셋 째, 새로운 만남에 대해 존중해주는 것이다. 한 사람이 ..
나는 인간의 눈을 피해, 인적이 드문 호숫가를 자주 찾는다. 흙발로 걸어가 온전히 잠기는 시간이다. 그들에 비해 참으로 못생긴 나의 마음은 지적(指摘), 한 숨, 취급 따위에 때묻어 다시 그 오염을 씻어내는 의식을 반복하는 것이다. 섞여 살아가는 존재로서 나의 정체성보다 우리의 보편성을 강요받는 사회. 모두의 시력을 떨어트리고 있다. 생각하지 못하는 인간들의 맹목적인 삶의 형성. "인간들의 말을 믿지마." 모순적이고 편협한 인간. 그런 인간인 줄 알면서도 인간이 되지 못해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다름은 무엇인가, 특별한 것과 이상한 것의 경계가 모호하다. 그저 '종'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인간으로부터 이해받길 바라는 희망을 버려라. 결코 그들이 나보다 우월한 '종'이라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어떠..
"혹시 저를 아세요?" 지금까지 어떤 사람을 만나왔고, 어떤 삶을 살았고,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아가는지 당신은 모른다. 82년도에 여자로 태어나 살아가는 삶, 64년도에 남자로 태어나 살아가는 삶, 어느 누가 더 힘들고 외로웠는가. 그 척도를 판단하고 인정을 구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작품을 인정하지 못하는 의견이 팽배하다. 이는 82년생 김지영을 하나의 페르소나로 보지 못한 결과라 생각한다. 82년생 김지영은 82년생 김철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82년생 김지영의 삶을 보여주는 것이다. 30년을 함께 살아온 가족조차도 서로를 알지 못 한다. 누구의 삶도 판단할 수 없고, 누구도 나의 삶을 판단할 수 없다. 3포 세대가 386세대를, 기성세대가 신세대를,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
인간은 모순적인 존재다. 생각과 말이 같을 수 없는 것이다. "못 생겼다.", "키가 작다.", "징그럽다."들은 "그렇게 말 하는 거 아니야."로 교육되어 안전한 사회 울타리 안에 거짓말 티켓을 들고 입장하게 된다. 얼마전 지하철에서 몰카 찍다 걸린 앵커를 보라. 그의 소신있고 참된 발언들은 소신있어 보이고 참되어 보이는 앵커 입장권에 지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그의 행동은 잘못 되었으나, 욕망엔 잘못이 없다. 인간은 모두 괴물이기 때문이다. 폭력, 섹스, 살인 등의 충동에 스스로 회의감을 느끼나, 이내 무뎌지고 외면함으로써 '평범한 사람'이 되기 위한 본성 편집을 반복한다.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인간이 모순적인 존재라는 것은 인정하자는 것이다. '사실..
5호선 충정로 역에서 데리고 나오지 못한 우산, 김포 가는 버스를 물어보던 할아버지. 이 가벼운 이별들은 사람에게 부여된 가장 큰 과제, 나와의 이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조부모가 돌아가셨다. 부모의 눈에서 차례를 준비하는 체념을 보았다. 부모가 죽고, 선배가 죽고, 친구도 죽으면 나 또한 누군가에게 체념의 눈동자가 될 것이다. 가족, 친구, 배우자는 이별의 좋은 소재다. 다만 우리의 과제, 마지막 이별의 대상은 우리 자신임을 외면하지 말자.
인간은 타인의 '이것만'을 찾는다. 너는 다 좋은데, '이것만' 고쳤으면 해. 그것이 어이없고 억지스러운 것일지라도 우리는 타인의 '이것만'을 쉽게 정의내린다. 아니, 사실 그 모든 것에 억지스럽지 않은 것들이 없다. 동의 없는 전지적 시점에서, 본인의 관점을 마치 상대 삶의 과제처럼 부여하는 것이다. 돈, 권력, 나이와 같은 것들은 그 눈을 더욱 멀게한다. 저마다의 기준은 본인이 될 수 밖에 없을 터,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라고는 하나 한 낮 인간에 불과한 눈으로 사람을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이상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설명하지 않으리라. 이해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는 임계점에 다다를 때 생각한다. 끓을 것인가, 머지않은 과거까지는 마지막 1도를 '노력'이라는 스트레스성 행동이라 여겨왔었지만, 그것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한다. 마지막 1도는 어떤 제목이든 간에 엔돌핀성 행동이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