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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무구를 표방한 얼굴로 제 한 번 살아보겠다고 검은 비닐봉지를 싸매고 온다. 생명의 창자를 뒤적거리는 소리는 언제나 고통의 비명으로 들린다. 주변을 일시 마비 시킬정도로 악을 쓰고 버티지만, 송장이나 다름 없는 나무 젓가락과 함께 찢겨 아가리를 벌린다. 추악한 군침 뚝뚝 흘리며 먹어치우는 우리 인간의 모습은 우아하고도 역겹다. 이름 모를 무고한 영혼을 자르고 닦고, 볶고, 찔러 알록달록한 접시에 담는다. 그윽한 조명, 추억이라는 이름 아래 "잠깐!" 범죄 기록을 남겨야 한다. 지나가는 고양이를 재미로 죽이는 것이나, 인간이 못 먹어치워 그냥 버려지는 생명들이나 뭐 크게 다를 바 있나.
이 세상에 정상인 사람이 존재할까. 우리 사회 어느 한 켠이라도 정상적인 환경이 존재하는가. 겨우 처음 살아보는 세상, 모두가 미흡한 존재에 불과한 것을. 만취한 덤프트럭이 인도를 침범해 들이 받는 일이나 마찬가지로 우리는 모두가 정상으로 태어났겠으나 그렇게 피치 못 할 무차별적 '사고'를 당하며 자란다. 뼈가 부러지고, 살갗이 썩어 문들어져가는 보편적인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무덤덤하게 "그래도 세상은 살 만한 거지" 스스로를 세뇌하는 자들만이 '정상인' 딱지를 붙이고 사는 게 아닌가.
어느 날씨 우중충한 날, 늘 가는 밥집. 나보다도 더 단골인 것 같은 할아버지 한 분이 항상 씩씩하던 주인 아저씨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왜 이렇게 힘이 없어 보여?" "술을 못 먹어서요." 힘이 들어서 술을 먹는데, 힘이 드는 이유가 술을 먹지 못해서다.
눈을 뜨면 씻고 출근합니다. 세 끼 밥을 챙겨 먹고 퇴근하면 오염된 옷을 빨래합니다. 일어나는 일, 먹는 일,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일. 이 반복되는 레퍼토리는 불교에서 말하는 반복이라는 지옥이 아닐까요. 강남에 집이 있는 사람, 단칸방 조차 없이 길바닥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사람, 삶의 차이는 있겠지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삶이 보장되지 않은 자와 표면적인 힘듦의 차이는 있겠으나 돈이 많으면 많은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날도 있고 힘든 날도 있죠. 당신은 두 날 중에 어떤 날이 더욱 많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모든 일은 내가 마음 먹기에 따라 다르다고 하신다면 그것은 지극히 삶을 주관적인 관점으로 봐야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답은 여기에 있겠지요. ..
그러고 보니까 모든 근경은 전쟁이고, 모든 원경은 풍경 같습니다. -책은 도끼다 중 그러니까 지금 내가 슬프고 힘든 이유는 클로즈업이 너무 많이 되었다는 말이 된다. 사람에, 일에, 직장에. 몇 걸음 물러날 필요가 있다. 비행기를 타고 밖을 보면 내가 저 작은 세계에서 혼자만 치열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작은 일부를 삶의 전부인 마냥 대했던 것이다. 클로즈업의 시작은 기대심이다. 기대하지 말라. 사람에, 일에, 직장에.
연극에는 숨길 수 없는 소리가 있다. 관객을 향한 배우의 힘찬 발구름 소리. 유독 그 소리가 적나라한 이유는 지난날 허기진 배를 두드리는 듯한, 가볍고 저렴한 마룻바닥이 절규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대게 성인이 되면 사회적 언어를 사용한다. 다시 말해, 말의 모서리를 둥글게 다듬는 사포질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에 꺼내 보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 대다수는 그 암묵적인 관례를 알기에, 또 함께 닦아 내오고 있기에 깎여나간 부스러기를 붙여, 본래 있던 날카로운 모서리를 찾아내곤 한다. 예컨대 "아, 이것보다는 저게 괜찮은 것 같아요."라는 말을 "아 이건 너무 촌스럽고 진부해요."라는 식으로 필터된 말을 다시 역필터해서 받아들이는 것이다. 워드는 점점 무색해진다. 말을 할 때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어떤 톤이었는지, 말과 말 사이의 침묵은 몇 초 정도 되었는지. 0이라는 대답을 두고 +, -오차 범위에 대한 추리로 가득한 세상. 착각은 자유, 오해는 금물. 때론 이처럼 확신으로부터의 격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