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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 드 보통-1993)

2e2e 2021. 8. 20. 01:12

삶에서 낭만적인 영역만큼 운명적 만남을 강하게 갈망하는 영역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영혼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과 어쩔 수 없이 잠자리를 함께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상황에서, 언젠가는 꿈에 그리던 남자나 여자와 만나게 될 운명이라고
믿는다면 용서받지 못할까?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고통스러운 갈망을 해소해 줄
존재에 대한 미신적인 믿음은 용납될 수 없는 것일까?
우리의 기도는 절대로 응답받을 수 없고,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비참한 순환에는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에 하나 하늘이 우리를 가엾게 여겨 우리가
그리던 왕자나 공주를 만나게 해준다면, 그 만남을 단순한 우연의 일치로 치부
해버릴 수 있을까? 한 번만이라도 논리에서 벗어나서 그 만남이 우리의 낭만적
운명의 징표라고 해석할 수는 없을까?

 

 

 

어떤 사람을 두고 자신의 필생의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살아보고 나서야 가능한 일이다(따라서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클로이를 만난 직후, 그녀를 필생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게 무리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둘 다 그때까지 미신적인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느끼던 것,
즉 우리가 서로에게로 운명지어졌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무수한 사실들-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을 손에 쥐게 되었다.
우리는 둘 다 짝수 해의 같은 달 자정 무렵
(그녀는 오후 11시 45분, 나는 오전 1시 15분)에 태어났다.
우리 둘 다 클라리넷을 분 적이 있으며,
둘 다 학교 다닐 때 <한여름 밤의 꿈> 공연에
참가한 적이 있었다.
우리 둘 다 왼쪽 발가락에 커다란 점이 둘 있었고,
똑같은 뒤쪽 어금니에 충치가 있었다. 우리 둘 다
햇빛이 밝은 곳으로 나가면 재채기를 했으며, 케첩 병에서
칼로 케첩을 긁어냈다. 심지어 우리의 책꽂이에는 똑같은
<안나 케리니나>(옛 옥스퍼드판)가 있었다.
사소한 일들일지 모르지만, 이 정도면 신자들이 새로운
종교를 세우기에 충분한 근거가 아닐까?



우리는 사건들에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서사적 논리를 부여했다.
클로이와 나는 우리가 비행기에서 만난 것을 아프로디테의 계획으로
신화화했다.



우리 두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늘의 거대한 정신이 우리의 궤도를
미묘하게 조정하여 우리를 어느날 파리발 런던행 비행기에서
만나게 해준 것 같았다.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래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엘리아스 카네티

타인의 흠을 찾아내는 것이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것이 또 얼마나
무익한지를 암시하는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사람을 꿰뚫어보는 일을 중단하고자 하는 순간적인 의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설혹 그 과정에서 눈이 약간 먼다고 하더라도?
냉소주의와 사랑이 스펙트럼의 양극단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가끔
사랑에 빠지는 것은 습관화되다시피 한 맥빠지는 냉소주의에서 벗어나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갑작스러운 사랑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장점을
의도적으로 과장하는 면이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과장 덕분에 우리는 습관이 된 비관주의에서 벗어나,
우리 자신에게라면 결코 가능하지 않았을 믿음을 가지게 된 어떤 사람에게
우리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녀가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가 그녀가 하는 모든 말에서
완벽함을 찾아내기로 결심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에게 완전히 감정을 이입하기 위하여
나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은 포기할 준비, 그녀의 모든 기억을
차곡차곡 분류 정리할 준비, 그녀의 유년의 역사가가 될 준비,
그녀의 모든 사랑과 공포를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마음과 몸 안에 흘러다녔을 모든 것이 곧 매혹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자신에게 있는 것-비겁함, 심약함, 게으름, 부정직, 타협성,
끔찍한 어리석음 같은것-을 상대에게서 발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랑에 빠진다.



겨우 아침을 함께 보낸 주제에 사랑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낭만적 미망과 의미론적 우둔이라는 비난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사랑에 빠질 수 밖에 없는 것 같다.
최초의 꿈틀거림은 필연적으로 무지에 근거할 수 밖에 없다.
사랑이냐 단순한 망상이냐? 시간(이 또한 나름으로 거짓말을 하지만)이
아니라면 누가 그 답을 말해줄 수 있을까?



구애를 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의심들이 한 가지 중심적인 질문으로
환원되고, 구애자는 판결을 기다리는 범죄자처럼 떨면서 그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나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당장 처리해야 하는 긴급한 일처럼 계속
내 의식을 뚫고 들어왔다.



전화기는 전화를 하지 않는 연인의 악마 같은 손에 들어가면
고문 도구가 된다.



그녀의 웃음의 입꼬리에서 유혹의 흔적을 찾아낸 것 같은데,
맞나? 아니면 나의 욕망이 순수의 얼굴에 투사된 것뿐일까?



욕망 때문에 나는 실마리들을 악착같이 쫓는 사냥꾼이 되었다.
모든 것에서 의미를 읽어내는 낭만적 편집증 환자가 되었다.



가장 매력적인 사람은 곧바로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락하는 사람
(우리는 곧 배은망덕해진다)이나 절대 우리에게 입맞춤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우리는 곧 그사람을 잊어버린다)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의
양을 적절하게 안배하여 상대의 마음에 안겨줄 줄 아는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사랑을 믿느냐고 묻는다면,
아마 안 믿는다고 대답할 거예요. 하지만 그게 반드시 사람들의
진실한 생각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그것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자신을 방어하는 방식일 뿐이거든요.



우리의 머뭇거림은 하나의 게임이었다.
그러나 진지하고 유용한 게임이었다. 이런 게임을 통해 내키지 않아 하는
파트너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을 최소화할 수 있고, 원하는 파트너를
서로에 대한 욕망이라는 전망 속으로 서서히 끌어들일 수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내는 모호한 신호들과 마주쳤을 때,
이런 분명한 태도의 결여를 수줍음 탓으로 돌리는 것보다
더 좋은 설명이 어디 있겠는가.



가장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가장 쉽게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의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이다.



클로이는 너무나 오랫동안 나의 유일한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그녀와 공유할 수 없는 하나의 생각이었다.
침묵은 저주스러웠다.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둘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따분한 사람은 나 자신이 되고 만다.



물론 침묵과 서툰 태도는 욕망의 애처로운 증거로 여길 수 있다.
별로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은 유혹하기가 쉽기 때문에
유혹에 서툰 사람이 오히려 진정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관대하게 봐줄 수도 있다.



<위험한 관계>라는 책에서 드 메르퇴유 후작부인은
드 발몽 자작에게 편지를 쓰는데, 후작부인은 자작의 연애편지가
너무 완벽하고 논리적이기 때문에 진정한 연인의 말일 수 없다고
까탈을 부린다. 진정한 연인의 생각은 두서가 없고 말은
조리가 안 선다는 것이다. 진정한 욕망은 명료한 표현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나는 그 순간에는 나의 말의 변비를 자작의 다변과 바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다른사람에게 끌리는 것은 곧 나의 모든 개인적 특징들을
버리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나의 진짜 자아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완벽성과 화해 불가능한
갈등관계에 있으며, 따라서 무가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력을 느끼는 것은 계획이 아니라 우연이다.



클로이에 대한 나의 낮 시간의 지식과 밤 시간의 지식 사이,
그녀의 성기와의 접촉이 뜻하는 친밀함과 그녀의 삶의 나머지
미지의 영역 사이의 불균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작 상대가 나를 사랑해줄 경우에
그 사람의 매력이 순식간에 빛이 바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락한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이상적인 사람과 함께 있고 싶어서 사랑을 한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어느 날 마음을 바꾸어 나를 사랑한다면
어떻게 될까? 나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사람이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만하다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취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인데,
그런 문제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내가 바라던 대로 멋진 사람일 수 있을까?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어떤 면에서 나보다 낫다고 믿어야만 한다면,
상대가 나의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잔인한 역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묻게 된다.
“그/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멋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아는 또다른 마르크스(미국의 희극인)는 자신과 같은 사람을
회원으로 받아들여줄 클럽에는 가입할 생각이 없다고 농담을 했다.
이 농담은 클럽 회원권과 마찬가지로 사랑에도 적용되는 진리이다.



그녀가 조금이나마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녀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떤 남자가 9시에 전화를 걸겠다고 하고 진짜 9시에 전화를 하면
나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아. 결국 그 남자가 필사적으로 얻으려고 하는 것이
뭐겠어? 내가 좋아하는 유일한 남자는 나를 계속 기다리게 하는 남자야.
9시 30분이 되면 나는 그 남자를 위해서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
되거든.”



만일 우리 내부에 부족한 데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지 않겠지만,
상대에게서도 비슷한 부족한 데를 발견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답을 찾기를 기대했지만, 우리 자신의 문제의 복사본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양 사상의 오래되고 우울한 전통은
사랑은 본질적으로 보답받을 수 없는,
마르크스(미국의 희극인)주의적인 감정이라고 주장한다.
상호 간의 사랑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욕망은 더 커진다는 것이다.



목표를 성취하면, (침대에서건 어떤 식으로건)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면 소진되어버린다.



“사랑에는 우리를 피해서 달아나는 것을 미친 듯이 쫓아가는 욕망밖에 없다.”
-몽테뉴



“우리가 이미 가진 것을 사랑하는 것은 관례적이지 않다.”
-아나톨 프랑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기초로 해서만 생길 수 있다.”
-스탕달



“사람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를 가장 좋아한다.
그것이 정열을 강하게 불태우는 데 적합하기 때문이다.”
-드니 드 루주몽



이런 관점을 따르면 연인들은 누군가를 향한 갈망과
그런 갈망을 없애고자 하는 바람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일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불충분한 자료에 기초하여 사랑에 빠지며,
우리의 무지를 욕망으로 보충한다.



몸의 어떤 부분, 또는 몸의 어떤 부분을 가리고 있는 것이
그 사람에 관해서 많은 것을 이야기해주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구두는 풀오버 스웨터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며,
엄지손가락은 팔꿈치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며,
속옷은 외투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며, 발목은 어깨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가장 사랑하기 쉬운 사람은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로맨스는 우리가 오랜 기차 여행을 하다가, 창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름다운 사람을 몰래 눈여겨보며 상상하는 것처럼 순수하지 않다.
그런 완벽한 러브스토리는 그 아름다운 사람이 다시 열차 안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사람과 기차에서 파는 샌드위치가 너무 비싸다며
따분한 대화를 나누거나, 아니면 손수건에 세차게 코를 푸는 순간
중단되고 만다.



사랑하는 여자를 더 잘 알게 되었을 때 느끼는 당혹감은
머릿속에서 작곡한 놀라운 심포니를 나중에 대편성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소리로 들었을 때의 느낌과 같다.



위협적인 차이는 중요한 점(국적, 성, 계급, 직업)에서 쌓여가는 것이 아니라,
취향과 의견이라는 사소한 점에서 쌓여갔다. 왜 클로이는 파스타를 몇 분
더 끓여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것일까?



인류학자는 늘 집단이 개인보다 앞서며, 개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집단을 먼저 검토해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부모가 우리더러 일요일에 말버러 근처의 집으로 오라고
초대했을 때, 나는 과학적 탐구정신 때문에 그 제안을 받아들이자고 졸랐다.



클로이가 이 모든 것으로부터 달아나 대도시로 왔다고 한들,
그녀 나름의 가치와 친구들을 찾았다고 한들, 이 가족은 여전히 그녀가
속해 있는 유전자와 역사적 전통을 대표했다.



내가 그녀를 알기 전의 그 모든 세월과 습관들, 그러나 그것도
그녀의 코의 모양이나 눈의 색깔과 마찬가지로 그녀의 일부였다.



내가 앞으로 클로이에게서 발견할 모든 차이를 생각하며,
그녀는 그녀고 나는 나일 그 모든 시간, 우리의 세계관이 양립할 수 없는
시간을 생각하며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상대를 마음대로 살게 해주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상대가 우리더러 마음대로 살라고 허락한다면
그것은 보통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왜 너는 연극을 그렇게 따분해하니? 왜 너는 꼭 백 년은 된 것 같은
저고리를 입으려고 하니? 왜 너는 자면서 이불을 침대 밖으로 밀어내니?
왜 너는 솔 벨로가 그렇게 위대한 작가라고 생각하니?
어쩜 너는 아직도 주차를 할 때마다 바퀴를 보도에 걸쳐놓니?
왜 너는 자꾸 베개에 발을 올려놓니?
이 모든 것이 가정이라는 강제 수용소를 구성하는 요소들이며
상대를 자신의 이상형에 더 가까이 끌어들이려는 일상적 시도들이다.



클로이와 나는 친구들에게라면 절대 우리에게 서로 그러는 것처럼
잔인하게 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친밀함을
일종의 소유권이나 허가장으로 여겼다. 우리는 서로에게 친절했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예의는 차리지 않았다.



혁명의 시작은 심리적으로 볼 때 남녀관계의 시작과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통일에 대한 강조, 전능하다는 느낌, 비밀을 없애고자 하는 욕망
(비밀에 대한 공포는 곧 연인의 편집증과 비밀경찰을 낳는다).



클로이가 순교자 노릇을 하려는 데에 지쳤지만, 그녀를 “잔 다르크”라고
부르는 식으로 대응할 수 있을 때는 덜 피곤했다. 유머가 있으면
직접적으로 대립할 필요가 없었다. 자극물 위를 미끄러져 넘어갈 수 있었고,
그것을 비스듬하게 바라보며 눈을 찡긋할 수 있었고, 실제로 말을 하지
않고도 비판을 할 수 있었다.



농담 뒤에는 차이에 대한, 심지어 실망에 대한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이제 긴장이 완화된 차이였고, 따라서 상대를
학살할 필요 없이 넘아갈 수 있었다.



가장 흥미로운 얼굴은 대개 매력과 비뚤어짐 사이에서 동요한다.
완벽함에는 어떤 압제가 있다. 심지어 어떤 싫증이 느껴진다.



진정한 미는 아슬아슬하게 추를 희롱한다.



고전적으로 아름다운 여자는 남자에게 상상력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클로이의 얼굴은 그 모호함 때문에 오리와 토기가 둘 다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는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 그림과 비슷했다. 이 그림에서는 보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많은 것이 달라진다. 상상력이 오리를 찾으면 그는 오리를
보게 될 것이다. 상상력이 토끼를 찾으면 토끼가 나타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보는 사람의 경향이다.



우리는 밤에 같은 침대에서 같은 책을 읽는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나중에 우리가 각기 다른 데서 감동을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했다.
결국 다른 책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한 줄의 사랑의 메시지에서도
똑같은 차이가 발생하지 않을까? 나는 마치 어느 것이 가닿을지도
모르면서 허공에 수백 개의 포자를 방출하는 민들레가 된 느낌이었다.



“생일이면 원래 그렇잖아. 생일이란 게 죽음을 떠올리게 하는데도
억지로 즐거운 척 해야 되잖아…”



슈퍼마켓 계산대 위에서 움직이는 여자의 손에서
매력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클로이의 몸짓들은 빙산의 일각처럼 그 밑에 놓인 것을 가리켰다.
그것의 진정한 가치, 호기심이 덜한 사람이나 사랑이 덜한 사람에게는
당연히 의미 없어 보일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서 바로 연인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클로이를 향한 내 뜨거움을 친구들과 공유해보려고 했다.
영화, 책, 정치와 관련하여 많은 공통점을 발견한 친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메시아적 열정에 사로잡힌 사람을 마주한 무신론자들처럼
세속적이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 친구들한테 세탁기 옆의 클로이,
영화관에서의 클로이와 나, 주문을 하려고 기다리는 클로이와 나에 대해서 열 번쯤은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플롯은 없고 액션조차도 거의 없는 이야기,
움직임이 거의 없는 이야기의 중심에 서 있는 중심인물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이야기를 해보고 나서야 나는 사랑이 외로운 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실체의 속성 한 가지를 실체 자체로 대체해버린 것은 아닐까
왕관을 군주로, 바퀴를 자동차로, 백악관을 미국 정부로,
클로이의 천사같은 표정을 클로이로… …



오아시스 컴플렉스에서는 목마른 사람이 물, 야자나무, 그늘을 본다고 상상한다.
그런 믿음의 증거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 그런 믿음에 대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간절한 요구는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환각을 낳는다.
갈증은 물의 환각을 낳고, 사랑에 대한 요구는 왕자나 공주라는 환각을 만들어낸다.



의학사를 보면 자신이 달걀 프라이라는 이상한 망상에 빠져서 살아가는
사람의 사례가 나온다. 그가 언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찢어질까봐” 아니면 “노른자가 흘러나올까봐” 어디에도
앉을 수가 없게 되었다. 의사는 그의 공포를 가라앉히기 위해 진정제 등
온갖 약을 다 주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어떤 의사가 미망에 사로잡힌
환자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서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니라고 제안했다.
그렇게 하면 앉고 싶은 의자 위에 토스트를 올려놓고 앉을 수가 있고,
노른자가 샐 걱정을 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이 환자는
늘 토스트 한 조각을 가지고 다녔으며, 대체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미망은 그 자체가 해로운 것이 아니다.
클로이와 내가 사랑의 노른자위를 말짱하게 보존할 수만 있다면
진실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물건을 떨어뜨리고 가는 일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그것은 칫솔이나 구두가 아니라 그녀 자신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은 언어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클로이는 나에게 그녀의 독특한
말투를 남겨두었다. 그녀는 “절때”라는 말 대신 꼭 “두 번 다시”라는
말을 사용하했으며, 전화를 끊기 전에는 “몸조심해”라고 인사를 했다.
반대로 그녀는 나의 “완벽해”라는 말과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라는 언어습관을 익혔다. 이어서 우리 사이에 습관들이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나도 클로이처럼 침실에서는 완전히 불을 끄게 되었고, 그녀는 나처럼
신문을 접게 되었다. 나는 무슨 생각을 할 때에는 소파 주위를 뱅뱅 돌게 되었으며,
그녀는 카펫 위에 눕는 것에 맛을 들였다.



“혼자서는 절대로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스탕달의 말이다.
성격의 기원은 우리의 말과 행동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있다는 의미이다.



나는 클로이를 사랑할지 모르지만, 그녀를 알기 때문에 그녀를 갈망하지는 않는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사랑한다는 기적을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녀는 내 삶의 일상적인,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는 특징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서로 소리를 지를 필요가 있었다.
우리가 서로 소리지르는 것을 견딜 수 있을지 없을지 보기 위해서라도
그런 과정이 필요했다. 우리는 서로의 생존 능력을 시험하고 싶었다.
서로 파괴하려고 해보았자 소용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우리가
안전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터였기 때문이다.



클로이는 갑자기 나에게 흥미를 잃을 수도 있었고, 죽을 수도 있었고,
다른 남자와 결혼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관계를 일찌감치 끝내고 싶은 유혹이 생겼다.



사랑에서건 돈에서건 오직 빈곤만이 체제에 의문을 품게 한다..



너는 내가 잃어버릴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린 나를 사랑하는가?
내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것들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가?



클로이가 윌과 시간을 모르고 논다고 상상하기보다는
사고를 당했다고 상상하는 것이 더 편했다.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내가 열쇠를 잃어버렸다고 비난하는 것 때문에
너에게 화가 났다는 것은 나는 네가 이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에
화가났다는 더 폭넓은(그러나 말로 할 수 없는)메시지를 상징한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이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만적 테러리즘은 자신의 요구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그 요구를 부정해버린다. 테러리스트는 결국 불편한 현실,
사랑의 죽음은 막을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호텔로 걸어 돌아가면서 클로이는 내 외투 호주머니에 자기 손을 집어넣고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는 마주 입을 맞추지 않았다. 키스가 끔찍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이제 클로이의 키스를
진짜라고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상황의 아이러니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가 남자를 배반함으로 해서 생긴 고통을 놓고
배반당한 남자가 배반한 여자를 위로하고 있다니.



클로이의 눈물이 시작된 직후 기장이 착륙 준비를 하지 않았다면
그 눈물 때문에 승객들 모두가, 비행기 전체가 물에 잠겨버렸을지도 모른다.



클로이는 자신의 거부를 정리하면서 나를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악과 동일시했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 것을 선의 증거로 여겼다.
따라서 내가 여전히 그녀를 바란다는 한 가지 이유로 나는 그녀에게
“너무 좋은”사람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사랑이 오고간 것 모두가(오는 것은 그지없이 아름답고, 가는 것은 그지없이 끔찍했다.)
큐피드와 아프로디테의 게임의 노리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나에게 일깨워주었다.
견딜 수 없는 벌을 받은 나는 나의 죄가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그러나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몰랐기 때문에 무조건 잘못했다고 자백했다. 내 속을 샅샅이 뒤져
흉기를 찾아보았다. 건방졌던 태도 하나하나가 되살아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일상적인 잔인하고 무심한 행동들, 신들은 그 어느 것도 놓치지 않았고, 이제 나에게
무시무시한 복수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나의 정체성은 오랫동안 “우리”를 둘러싸고 만들어졌기 때문에,
“나”로 돌아가려면 나 자신을 다시 만들다시피 해야 했다.



지혜는 우리에게 우리의 첫 충동이 꼭 진실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고,
이성을 훈련시켜서 무익한 요구와 진정한 요구를 분리하지 않으면
욕심 때문에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상상력을 통제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그것이 현실을
왜곡하여 산을 흙둔덕으로, 개구리를 공주로 바꾸어버릴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두려움을 제어하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해룰 주는 것을
두려워하되 벽에 어른거리는 그림자를 보고 에너지를 낭비하지는 말라고 가르친다.
지혜는 우리에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 자체라고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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