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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2018) 본문
개정판에 부쳐
나는 왜 아직 살아 있는가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너 나 할 것 없이 자기가 누울 관을 향해 낙하 중이다.
삶을 바라본다는 것은 낙하물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수명이 긴 사람은 제법 높은 곳에서.
수명이 짧은 사람은 꽤 낮은 곳에서 예외 없이 떨어지는 중이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아침에 직장 상사를 생각하는 것보다 낫다.
아침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노을을 보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좋지 않다.
죽음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죽음을 삶으로부터 몰아낼 수 있다.
프롤로그
아침에 죽음을 생각한 이들의 연대기
이토록 부질없는 생인데도 불구하고,
아니 부질없는 생이기에, 우리는 평생 욕망으로 몸부림친다.
루크레티우스(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는 말했다.
"우리는 없는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은 무시한다.
...... 삶은 그런 식으로 소진되며, 죽음은 예기치 못하게 다가온다.
이처럼 덧없는 욕망으로 인해 삶이 소진되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헛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는가?
선학들은 말했다. 죽은 자에게 찬사는 아무 가치가 없다고.
몽테뉴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죽음이 주는 무서움에 대한 가장 한심한 대응이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죽을 수조차 없다.
이미 죽어 있으므로. 살아가는 일은 죽어가는 일이므로.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옥상으로 올라가던 그 사람들이
그토록 살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누군가 그토록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그 하루를 사는 것이다.
사람은 두 번씩 죽는다.
자신의 인생을 정의하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어 삶의 의미가 사라졌을 때 사회적 죽음이 온다.
그리고 자신의 장기가 더 이상 삶에 협조하기를 거부할 때 육체적 죽음이 온다.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은 없다
만화 <허니와 클로버>의 주인공은 말했다.
"내리는 눈을 올려다보고 있자면, 모래시계 바닥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나는 새해에 행복해지겠다는 계획 같은 건 없다.
행복의 계획은 실로 얼마나 인간에게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가.
행복이라는 말을 통해 의미하는 것은 대개 잠시의 쾌감에 가까운 것.
행복이란, 온천물이 들어간 후 10초 같은 것.
그러한 느낌은 오래 지속될 수 없기에, 새해의 계획으로는 적절치 않다.
오래 지속될 수 없는 것을 바라다보면, 그 덧없음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쉽게 불행해진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새해라는 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고.
과학소설에 나오듯이, 통 속에 든 뇌에다가 어떤 미친 과학자가
새해라는 이름의 자극을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가상현실을 통해서라도 우리 삶에 리듬감을 주는 것이
영장류가 발명한 삶의 지혜일 수 있다고.
1분이 60초라는 것도, 한 시간이 60분이라는 것도, 하루가 24시간 이라는 것도,
열두 달이 지나면 한 해가 저문다는 것도, 그리하여 마침내 새로운 해를 맞는다는 의식도
모두 인간이 삶을 견디기 위해 창안해낸 가상현실이다.
시간의 흙탕물 속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당하면 거치게 된다는 심리 변화 4단계,
부정-분노-체념-인정을 오롯이 밟아나가는 것이다.
자신은 충분히 단련되어 있으므로 그중 어떤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고 자만하지 말자.
성장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태어나고, 자라고, 상처 입고, 그러다가 결국 자기 주변 사람의 죽음을 알게 된다.
인간의 유한함을 알게 되는 이러한 성장 과정은 무시무시한 것이지만,
그 과정을 통해 확장된 시야는 삶이라는 이름의 전함을 관조할 수 있게 해준다.
결혼을 하고야 말겠다는 이들을 위한
세 가지 주례사
결혼을 하고 나서 함께 보낼 미래의 시간들은
다름 아닌 노화의 과정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부부지만 상대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말기 바랍니다.
특히 각자 상대가 모르는 외로운 전투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우자가 자신이 모르는 어떤 외로운 싸움을 혼자 수행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주기 바랍니다.
자식에 대한 세 가지 에피소드
나 : 아이를 낳는 것이 좋습니까, 아니 낳는 것이 좋습니까?
자왈 : 모른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고,
겪은 사람은 자기 행동을 정당화하려 들 것이다.
다시 태어나서 아이를 낳지 않아보기 전까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를 낳는 것은, 대체로, 세상에 뿌리를 내리는 한 방법이다.
추석을 즐기는 법
추석도 이번 생의 하루에 불과하지 않겠나
만화책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누가 그랬던가, 휴식의 궁극은 죽음이라고.
쉬고자 하는 욕망 끝에는 죽고자 하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다고.
대학원에 가고 싶은데요
더닝-크루거 효과 (일종의 심리 편향)
쉽게 말하자면 무식할수록 용감하다.
무식한 사람일수록 진리를 안다고 설치는 반면,
유식한 사람일수록 진리에 대해 잘 모르겠다고 하는 거죠.
하루가 멀다 하고 언론매체에 나와서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은
대개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아요.
사람은 결국 죽는다는 게 인생에 대한 스포일러라면,
진리를 결국 다 알 수 없다는 게 학문에 대한 스포일러입니다.
요컨대, 진리를 알기 위해서라기보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기 위해서 학문을 하는 셈이죠.
K교수의 국가론
"오늘의 주제는 국가입니다. 올슨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란 깡패죠.
깡패는 약자의 금품을 갈취하는 게 일이죠.
주변의 약자로부터 더 뺏을 게 없어지면,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죠.
그렇게 유랑하다가 약자와 마주치면 또 뺏죠.
유랑 생활이 피곤해졌을 무렵 국가가 탄생한다고 하네요.
깡패가 정착해서 세금을 걷기 시작하는 거죠.
약자를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리면, 피곤하게 또 다른 약자를 찾아 떠나야 하니까
이제 폭력을 자제하죠. 대신 선거를 치르기도 하고, 국정교과서를 만들기도 하는 등
자기 합리화를 통해서 어느덧 민주국가가 된다는 군요.
2월의 졸업생들에게
실로 여러분들은 학창 시절 동안 귀중한 것들을 가차 없이 소비했습니다.
비싼 학자금이랄지, 젊음이라는 이름의 소중한 시간이랄지,
흡연과 과음으로 거덜 나기 이전의 깨끗한 장기랄지.
젊음같이 귀중한 것을 낭비해버리는 것은 그 나름 쾌감이 따르는 일입니다.
어떤 기준으로 지나온 학창 생활을 평가할 것인가?
학교 졸업 후 얼마나 높은 연봉의 안정된 직장을 가지게 되었는가가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중요한 평가의 기준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러분이 현실 사회에서 타인과 사는 일의 고통과 영광을
얼마나 잘 겪을 마음의 준비, 즉 정치적 덕성을 습득했냐는 것입니다.
즉 얼마나 성숙한 정치 주체가 되었느냐 하는 것이,
졸업생들이 염두에 둘 만한 평가 기준이라고 생각합니다.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미래에 우리가 죽음을 앞두고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
적용되어야 할 평가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때 평가 기준은,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 얼마나 사회적 명예를 누렸느냐,
누가 오래 살았느냐의 문제는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보다 근본적은 평가 기준은,
누가 좋은 인생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냐는 것입니다.
적폐란 무엇인가
태초에 부정행위가 있었으리라. 그것을 발견한 사람이 있었으리라.
그리고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사람이 있었으리라.
부정행위를 눈감아준 대가로, 부정행위를 저지른 이의 충성을 얻고,
그 충성에 기초해서 이득을 얻거나 권력을 누렸으리라.
그 과정을 지켜본 다른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거래에 동참했으리라.
그리하여 부정행위의 용인이 쌓이고 쌓이자, 그 적폐는 관행이 되었으리라.
급기야는, 그 관행에 한통속이 되지 못하면 오히려 상대적 손해를 보게 되었으리라.
(위장전입, 이중국적, 전관예우, 남발되는 자격증과 상)
그것들을 못하게 하면 강변하는 거다. 다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갖고 그래,
불.공.평.하.게! 그리하여 마침내 부정행위가 관행을 넘어 정의의 반열에 올랐으리라.
졸업의 몽타주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말했다.
"삶이 진행되는 동안은 삶의 의미를 확정할 수 없기에 죽음은 반드시 필요하다."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 의심스로운 나머지,
젊은이라는 아이스크림이 다 녹아버리도록 바라보고만 있기도 한다.
마지막 수업의 상상
최후의 장애물이 남아 있으니,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원로 교수가 되면, 멀쩡하던 사람도 정신이 약간 갈 수 있다.
자신이 동료보다 나이가 좀 더 많다는 사실 하나로, 막말과 갑질을 하려 들 수 있다.
다가오는 정년이 불러올 권력 공백이 두려워, 측근을 후계자로 '심어'
영향력이 지속되기를 꾀할 수도 있다.
6월의 냄새
우리는 조금씩, 고독이 한때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황야가 아님을 깨달았던 것 같다.
희망을 묻다
이 땅에 희망이 있어서 희망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가진 사람이 되고 싶기에 희망을 가진다.
공화국 찬가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기 위해 인간이 해볼 수 있는 것이 정치다.
그래서 정치는 인간의 자력 구제 행위다.
보이지 않는 나라
실로 사람들은 과거에 존재했던 것만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라
한 번도 존재해본 적이 없는 것도 그리워한다.
사라지는 사람들
악이 너무도 뻔뻔할 경우, 그 악의 비판자들은 쉽게 타락하곤 한다.
사람들은 저 정도로 뻔뻔한 악은 아니라는 사실에 쉽게 안도하고,
스스로를 쉽사리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악과 악의 비판자는 일종의 적대적 의존관계에 있다.
자신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때로 악을 요청한다.
상대가 나쁘면 나쁘다고 생각할수록 비판하는 자신은 너무나 쉽게 좋은 사람이 된다.
내 인생의 영화 : 안토니아스 라인
세상은 지옥이며, 여기에 새로운 생명을 던진다는 것은
곧 태어날 누군가에게 고통을 부여한다는 의미와도 같다.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는 전제를 인정하는 한, 그것은 너무도 논리적인 결론으로 보이기 때문에.
사실 어쩌면 우리가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판단과 선택은
아이를 낳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결정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떤 환경 속으로 자신의 선택과 무관히 떨어진다.
비록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조건이 가진 경우의 수를 늘리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라는 조건을 받아들일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이분법적 판단에 불과하긴 해도, 그것은 정말 유일한, 조건 자체에 대한 판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아이의 출산은 적어도 그 순간까지 자신이 살아온 생에 대한,
세상에 대한 평가의 순간이기도 한 것이다.
신이란 때로 그 존재를 회의하는 이들 앞에서 허약하다.
사람들은 누가 신을 창조했는지는 묻지 않는다는 불평에 답하여 굽은 손가락은 말한다.
"신을 믿는 이들의 비극은 믿음이 지성을 지배해버린다는 사실이지."
게다가 역사에 조예가 깊은 그의 통찰에 의하면,
"이제껏 종교는 죽음과 파멸을 초래했다."
자살하는 나뭇잎은 없다. 죽은 듯 떨어졌던 나뭇잎은 봄이면 다시 피어나기 마련이다.
생명은 자살하지 않고, 그렇게 저물어갈 뿐, 그리고 후손을 다시 이을 뿐.
이렇게 보자면 아이를 낳지 않는 일이나 자살하는 일은 결국 자연과 보조를 맞추는 일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일이 된다.
설원에 핀 장미 아닌 꽃: 홍상수의 초기 영화
그 고약한 신과 피조물 간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는,
더 행복한 존재 대 덜 행복한 존재 간이 아닌, 더 도덕적인 존재 대 덜 도덕적인 존재 간이 아닌,
더 아름다운 존재 대 덜 아름다운 존재 간이 아닌, 똑똑한 존재 대 바보 간의 위계질서다.
이 고약한 신은 세상의 미만한 사랑과 도덕이 모두 해석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는 점에서,
진열장 안의 피조물들보다 똑똑하다.
하지만 그러한 지력이 그를 더 행복하게 만들거나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그것은 마치 실연 끝에 오는 허망한 지력과도 같은 것이다.
실연 끝에 오는 연애에 대한 통찰이 그 다음 연애를 보장하지 않듯이,
불행히도 그러한 지력이 우리 삶에 줄 수 있는 대안은 많지 않다.
그러한 지력이 가지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파괴적인 에너지다.
박식하고, 로맨틱하고, 예술적인 살인마: 한니발 렉터
인간이 구원되었다, 행복하다, 라고 말할 때는, 많은 경우,
대상으로부터 자신이 거리를 유지할 때라기보다는,
기꺼이 스스로 목매고 싶은, 스스로 그것 때문에 부자유스러워지고 싶은 어떤 대상을 찾은 경우다.
고전적으로 말하자면,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사라인 셈이다. 그 사랑의 대상이 신이든,
어떤 대의든, 연인이든 간에.
사랑은 비상식적인 상황일수록 강렬하다.
관습에 반하는 상황은 적어도 그러한 관습을 이겨낼 만한 정도의 진정성을 요청하며,
그 진정성의 느낌은 사랑을 불타오르게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강렬한 사랑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랑이다.
반영웅으로서 영웅, 관념론자로서 유물론자, 죽은 자로서 살아 있는자: 고스트 독
우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에의 헌신으로부터 온다
(이를테면 사무라이 됨이 근본 조건은 주군에 대한 헌신에 있듯,
가수의 정체성은 노래에 대한 헌신에 있듯.) 그 헌신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종류의 헌신, 어떤 종류의 욕망 없이는, 우리의 삶은 구겨진 종이에 불과하다.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무엇엔가 헌신함으로써 비로소 얻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누구나 주군이 필요한 사무라이들인 셈이다.
그런데 결국 우리를 파괴하는 것은 바로 헌신했던 그 주군이라는 점에 인생의 역설이 있다.
"우리는 소나기로부터 배울 것이 있지.
소나기를 만났을 때 젖지 않으려 빨리 뛰어가곤 하지만
결국 젖기 마련이지. 처음부터 젖을 각오를 하고 있으면,
젖더라도 적어도 당황하지는 않는다."
행복보다 소소하게 불행한 삶을 꿈꾸는 이유 - <신동아> 송화선 기자와의 인터뷰
질서를 싫어할 수는 있지만 그것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운 게 인간 조건이라면,
우리는 어떤 질서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권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권력을 싫어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권력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무작정 싫어할 게 아니라
어떻게 선용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의 불가피한 운명 중의 하나는, 남과 공존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당신이 집단생활, 공동체적 삶을 싫어하건 좋아하건, 상관없다.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공존'하지 않고서는 삶은 유지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타인과의 공존은, 운명이다. 정치학이란 그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정치사상이란, 그 운명의 사랑에 대해 근본에서부터 생각해보는 일이다.
김 교수는 찰나의 행복보다는 차라리 '소소한 근심'을 누리며 살기를 원한다고 했다.
"'왜 만화 연재가 늦어지는 거지', '왜 디저트가 맛이 없는 거지' 같은 '소소한' 근심을 누리는 건,
그것을 압도할 큰 근심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이란다.
김영민이란 무엇인가 - <문화일보> 나윤석 기자와의 대화
Q. '쉬운 글', '어려운 글', '흥미로운 글' 중에 어떤 글을 지향해야 하나?
A. 너무 쉽게 느껴지는 글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나
편견을 확인하는 글에 불과할 수도 있다. 좀 어렵긴 해도 흥미로워
자꾸 읽고 싶어지는 글이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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