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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손원평-2017) 본문
사랑은 누가 허락하거나 허락하지 않는
결재서류가 아니라고 엄마는 받아쳤고
그 결과 뺨을 맞았다.
책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만날 수 없는 사람의 고백을 들려주었고 관찰할 수 없는 자의
인생을 보게했다. 내가 느끼지 못하는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시선들이
비밀스럽게 꾹꾹 눌러담겨 있었다.
책은 달랐다. 책에는 빈 공간이 많기 때문이다.
단어 사이도 비어있고 줄과 줄 사이도 비어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앉거나 걷거나
내 생각을 적을 수도 있다.
나는 '썩을 년'이라는 할멈의 입버릇에 기분 나빠하는
엄마를 위해 '썩지 않는 여자'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그러나 책들은 조용하다.
펼치기 전까지 죽어있다가
펼치는 순간부터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곤조곤 딱 내가 원하는 만큼만
턱 소리나게 문이 닫혔다.
한 줄기 바람이 가게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옅은 여름향이 묻어있는 바람이었다.
우리는 칠판지우개나 분필처럼
그저 학교를 구성하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 사람은 내 인생에 시멘트를 쫙 들이붓고
그 위에 자기가 설계한 새 건물을 지을 생각만 해.
어쩌면 언어를 이해하는건 상대의 표정이나 감정을
알아채는 것과 비슷한지도 몰랐다.
시야엔 온통 낙엽들 뿐이었다.
주황색, 노란색 잎들이 하늘을 향해
손을 오므린채 쏟아져 있었다.
여름에 입은 봄 외투처럼
불 필요하고 성가시게 느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그리고 난 여전히
가슴이 머리를 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란다.
어느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다.
내가 운다. 그런데 또 웃는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